[주한 미군과 인천·(7)미군 범죄]시민들 '억울한 희생' 가해자 처벌조차 못해

박경호 기자

발행일 2017-12-21 제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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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문 거부 이유 대낮에 길거리서 총 난사
기름 훔치다 걸린 병사 되레 경찰에 총격
피해 잦은 기지촌, 자치회 만들어 시위도
사건사고 지금도 매년 200~300건 줄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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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30만명을 넘긴 주한미군 규모는 1970년대 초까지도 5만~8만명 수준을 유지했다. 미군은 한국 주둔 초창기부터 각종 범죄도 많이 저질렀다.

도심 곳곳에 미군기지가 들어선 인천지역은 특히 미군 범죄와 각종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여성과 어린 아이가 희생되기까지 하면서 사회적 문제로 비화하기도 했는데, 정작 가해자인 미군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였다.

미군정 시기인 1947년 3월 인천 화수동에 사는 명해철(21)씨가 대낮에 길거리에서 미군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미군이 검문한다며 명씨에게 멈추라고 요구했는데, 그가 그대로 도망쳤다는 게 총을 쏴 사살한 이유다. 이 사건은 대중일보 1947년 3월 12일자 신문에 보도됐다.

인천역에서 휘발유를 훔치던 미군을 체포하려다 오히려 그 미군이 난사한 총에 맞아 숨진 만석동파출소 임완철(23) 순경사건(대중일보 1947년 1월 23일자), 미 헌병의 한국인 부녀 윤간사건(1947년 1월 31일자) 등이 미군정 시기 인천에서 발생한 대표적 미군 범죄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부평 애스컴(ASCOM·주한미군 군수지원사령부) 주변 기지촌에서 미군 병사가 기지촌 여성을 살해하는 비극도 종종 일어났다. 1969년 5월 부평 기지촌 셋방에 살던 25세 여성이 목에는 전깃줄이 감기고, 온몸이 칼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20세의 미군 병사가 이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됐다. 1968년 9월 6일 새벽 인천 중구 관동의 한 여관방에서 미 헌병대 소속 밀러(21) 상병이 강모(21·여)씨에게 총을 발사해 숨지게 한 사건이 동아일보 1968년 9월 6일자에 보도됐다.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고 당시 동아일보는 전했다.

기지촌 여성을 대상으로 한 미군 병사의 폭력과 강력사건이 계속되자, 1960년대 말 부평 기지촌 여성들이 '자치회'를 조직해 미군부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어린아이가 미군의 총에 맞는 참극도 있었다. 1957년 7월 6일 인천 남구 용현동 미군 유류저장소(POL)의 송유관에 올라앉아 놀고 있는 김용호(3)군이 미군 도날드 파세트(19) 이병이 쏜 총을 맞고 희생됐다. 미군 자체 조사 결과 '오발'로 판명돼 파세트 이병은 미군 군법회의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1957년 8월 25일에는 용현동의 저수지에서 수영 중이던 조병길(18)군에게 송유관을 경비하던 미군이 총을 난사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조군은 왼쪽 손과 우측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받다가 결국 숨졌다.

1962년 6월에는 인천 작전동에 사는 김용상(9)군이 미군의 '지프'에 치여 중상을 입었고, 이듬해 6월 부평 새나라자동차공장(현 한국지엠 인천공장) 앞에서 신명주(5) 양을 미군 '쓰리쿼터' 트럭이 들이받아 신양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는 교통사고가 났다.

지금은 인천에 부평미군기지(캠프마켓)만 남기고 미군부대 대부분이 철수해 미군 범죄가 지역사회의 기억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법무부에 따르면, 주한미군 범죄는 2014년 263건, 2015년 269건, 2016년 295건, 올해 7월 기준 170건으로 여전히 매년 200~300건가량 발생하고 있다. 범죄를 저지른 주한미군 10명 중 7명이 기소를 피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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