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군과 인천·(8)미군정기 문화 체육]전국 첫 공립박물관·스포츠 '화끈한 지원'

박경호 기자

발행일 2017-12-22 제1면
글자크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링크
  • 메일보내기
  • 인쇄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메일전송
6·25때 사라진 시립박물관·예술관 유물·전시품 협조
해방 직후 야구팀 훈련·용품 도움… 전국대회 싹쓸이


해방 후 인천지역의 문화분야와 체육분야만큼은 다른 지역보다 활성화 했다. 이는 미군과 관련이 깊다. 우리나라 첫 공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은 미군정의 협조 아래 탄생했다. 한국 야구의 시발지인 '구도(球都)' 인천답게 해방 직후 미군과의 연이은 연습경기가 인천 야구팀을 전국 최강으로 성장시켰다.

인천시립박물관은 1946년 4월 1일 지금의 중구 자유공원 인근인 송학동 1번지 세창양행 사택에 개관했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 때 포화로 소실됐다. 인천시립박물관 개관은 인천 출신의 한국 1세대 미술평론가인 석남(石南) 이경성(1919~2009) 선생이 주도했다.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한 이경성 선생에게 인천 미군정 교육담당관 홈펠 중위와 통역관 최원영씨가 찾아왔다. 인천에 있는 향토관(세창양행 사택)을 박물관으로 만들자고 제의하기 위해서다.

인천시립박물관 탄생 과정은 이경성 선생이 1998년 자서전 격으로 쓴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에 자세하다. 도쿄 유학시절부터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뜻을 품던 이경성 선생은 1945년 10월 임홍재 인천시장으로부터 초대 인천시립박물관장으로 임명됐다. 27세의 젊은 나이였다.

시립박물관 설립에는 인천 미군정의 조력이 컸다. 인천 미군정 소속 홈펠 중위의 도움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문화재급 유물 19점을 빌렸고, 국립민속박물관을 설득해 60점의 민속품도 모았다. 일본인 세관창고에 있던 유물을 문화재 반출금지를 내세워 확보하기도 했다.

특히 해방 후 미군기지로 바뀐 일본군 군수공장(조병창)에 있던 중국 송·원·명대 철제 범종을 극적으로 수습할 수 있던 것은 미군의 협조 덕분이었다.

이어 이경성 선생은 1947년 미군정의 주선으로 현 중구 항동 올림포스호텔 인근에 있던 옛 영국영사관 건물을 인천시립예술관으로 탈바꿈했다. 고희동(1886~1965), 이상범(1897~1972), 배렴(1911∼1968) 같은 당대 일류 화가의 작품을 전시한 근대미술전이 이곳에서 열렸다. 이 건물 또한 한국전쟁의 포화를 피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해방 이후 인천에서는 야구팀 '전인천군'이 창단했다. 지금으로 치면 직장인 야구단 격이지만, 인천 미군부대와의 연습경기를 발판삼아 국가대표급 실력을 자랑했다.

유완식과 김선웅, 장영식 등 인천 야구 1세대를 주축으로 한 '전인천군'은 1947년 5월 제2회 4대 도시(인천·부산·광주·대구) 대항 야구대회에서 우승했고, 같은 해 전국지구대표 야구쟁패전, 월계기대회, 전국체전까지 우승을 싹쓸이했다.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렵던 시절, 이들의 야구용품은 미군으로부터 공급받을 수밖에 없었다.

1946년 인천 신흥초등학교에서는 인천농구협회가 주최한 '제1회 전인천 농구대회'가 열렸다. 인천 7개 팀과 함께 미군선발팀과 중국인팀이 참가해 국제대회를 방불케 했다. 농구의 본향에서 온 미군선발팀이 결승전에서 인천의 철마팀과 맞붙어 42대 28로 우승을 차지했다고 대중일보가 1946년 5월 6일자 신문에 보도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박경호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