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연인]낭비

권성훈

발행일 2017-12-25 제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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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얼추 다 왔다

조금만 더 쓰면 더 쓸게 없다

회계의 즐거움은 마이너스 플러스 영

하루에 사흘 치씩 말고

하루에 하루 치씩 정량대로

목숨 다 할 때 낭비도 끝내야지

생산이 아니라 다시 한 번 낭비

노동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사랑

아무것도 남길 수 없는 파산 신청자처럼

죽기 살기로 쓰기만 하기

헛되고 헛되게

신성하게

방민호(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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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영'이란 아무것도 없는 무(無)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을 무엇이든 있게 한다는 점에서 영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0 다음에 그 모든 숫자가 비롯되듯이 0은 다른 것들에게 종속되어 있거나, 봉사하지 않은 채 존재를 존재이게 만들며 존재를 세계에 풀어 놓는다. 숫자 9 이후에 '1-0'이 오듯이 12월의 끝은 '이제 얼추 다' 영에 도달해가고 있다. "조금만 더 쓰면 더 쓸게" 남아 있지 않은 '회계의 시간'은 우리가 처음에 왔던 '하루'도 없었던 곳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목숨도, 생산도, 노동도 있지 않은, 그래서 '죽기 살기로' 살아도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시간의 파산 속에 다가간다. "헛되고 헛되게" 살아온 당신의 회계는 다시 올 시간을 위해 "신성하게" 할지니.

/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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