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 신춘문예]文靑(문학청년)들이 뜨겁게 펼친… '서른두장' 꿈의 페이지

경인일보

발행일 2018-01-02 제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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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신춘문예]文靑(문학청년)들이 뜨겁게 펼친… '서른두장' 꿈의 페이지
[경인일보 신춘문예]文靑(문학청년)들이 뜨겁게 펼친… '서른두장' 꿈의 페이지

눈을 떴다. 파란색을 약간 섞어 바른 핸디코트 벽 위에 걸린 시계로 눈이 간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부끄러움 없이 투명 유리 안에서 몸을 섞고 있다. 커튼 밑 부분을 잡고 젖혀본다. 벌어진 틈만큼 직사각형의 네모난 햇빛이 열 두 평 오피스텔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깊은 숨을 쉰다.

초등학생처럼 색색의 옷을 입은 행거에 걸린 옷걸이들이 보인다. 어젯밤 벗어놓은 흰색 원피스가 허리를 꺾은 모습 그대로 그 위에 가로질러 누워있다. 원피스를 내려 기다란 타원형의 전신거울로 다가가 몸에 대어본다.

거울 속의 여자가 웃고 있다. 브이자로 파인 목과 민 소매, 샤넬라인의 원피스는 빛을 받아 한층 하얗다. 어제는 금요일이었다. 나는 금요일마다 나이트 클럽에 간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서.

창가에 놓인 허브는 오늘도 싱싱하다. 허브, 읊조려 본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닿을 듯 말 듯 바람이 인다. 외로움의 냄새를 잡아먹는 향이라고 주문을 걸며 사다놓은 허브가 바람에 무게를 실으며 하느작거린다. 몸을 일으켜 싱싱한 허브잎사귀를 똑, 똑 소리나게 딴다.

파인애플민트향의 허브가 물 속에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녹색 향을 뱉기 시작한다.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초록빛 허브 차를 한 모금 마신다.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진다. 남은 허브잎사귀를 욕조에 떨어뜨리고 더운물을 받는다. 수증기가 올라오는 욕조에 소금가7루를 솔솔 뿌려 넣는다.

거실바닥에 신문을 길게 펼친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는 일 중의 하나가 신문보기다. 손님과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위해서 스포츠란까지 꼼꼼히 읽는다. 신문 귀퉁이 박스란에 구스타프 말러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어릴 때의 반복되는 정신적 외상은 뇌의 발달에 영향을 주어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증상'을 만들기도 한다. 이런 외상을 극복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수단중의 하나가 '반복 강박'이다. 두려움의 대상과 관련되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체험함으로써 이를 극복하려는 집착 행동이 반복 강박이다.

구스타프 말러는 작곡가다. 십사 형제의 둘째로 태어나 아홉 명의 형제가 반복적으로 죽는 충격적인 어린 시절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에 간직된 마음의 상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반복하며 극복하려는 집착행동으로 나타나는데 어떤 행위, 그것은 작곡이었다.

나는 구스타프 말러의 기사가 실린 신문을 들고 가위를 찾는다. 가위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질 않는다. 캇터칼로 신문의 박스 기사를 오린 뒤 수첩 속에 끼워 넣는다.

신문을 펼쳐 놓은 채 욕실로 들어간다. 욕조에 몸을 누인다. 감은 눈꺼풀 위로 찬 물방울이 떨어져 순간 움찔한다. 바다 속 깊은 곳에 둥실 떠있는 느낌이다. 따뜻한 물 속에서 하릴없이 흘러 다닌다.

저 어디쯤, 사랑하는 이를 죽이지 못하고 물방울이 된 인어가 살고, 아버지를 위해 바다에 몸을 던진 효녀 심청이가 살고 있는 용궁이 있지 않을까. 발목에 물컹, 무언가가 닿는다. 온몸에 은빛 가루를 덮어쓴 갈치다. 내 키보다 더 큰 갈치가 몸을 일자로 세우고 물결을 가르며 내게 다가온다.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입술을 달싹일 수 없다. 갈치에 몸이 감긴 나는 깊숙이 깊숙이 가라앉는다. 숨 쉴 수 없어 손사래를 치다 머리가 어딘가에 쿵하고 부딪힌다. 물의 온기에 깜빡 잠이 들었던가. 머리를 흔들자 물방울이 사방으로 튄다. 물살을 떨치며 욕조에서 일어선다. 은색가루 대신 배와 허벅지에 허브잎사귀가 붙어있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차가운 물로 몸을 헹구고 물기를 닦는다. 샤워코롱을 온몸에 스프레이 한다. 창문을 활짝 연다. 태양은 여전히 작열하고 있다.

담요를 뒤집어쓴다. 하나, 두울, 세엣… 육십을 세고 담요를 벗는다. 하나, 두울, 세엣… 육십을 세고 다시 담요를 뒤집어쓴다. 처음에는 여기저기 퍼렇게 멍이 들던 풍욕이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몸이 바람을 잘 받아들인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오래 묵은 비린내를 큰 숨을 쉬며 내보낸다.

암환자나 깊은 병을 앓는 이들이 몸 속 독소를 제거하기 위해 하는 민간요법인 풍욕.

엄마는 지금도 풍욕을 하고 있을까? 아버지가 잠든 밤 마루에 서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풍욕을 할 때의 엄마는 평화로워 보였다. 엄마가 어떻게 아버지와 결혼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다. 그리고 생선을 팔고 있기에는 너무 예뻤다. 철이 들면서 엄마에게 나는 늘 말했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손톱청소 도구와 매니큐어가 든 바구니를 들고 와 신문 위에 놓는다. 손톱의 반달모양 위로 약간씩 비집고 나온 살점을 깨끗하게 민다. 손톱 주위의 지저분한 살점은 손톱깎이로 잘라내고 줄칼로 긴 손톱을 맵시있게 다듬는다.

<2001년 소설부문 당선작-나여경, 금요일의 썸머타임 일부>

저 숲의 적막속에서 한 生의 불씨를 당겨/純銀의 매듭을 풀고 알몸으로 깨인 넋이/이제 막 피를 吐하며 둥지트는 이 새벽.//외곬 달아나다 못다챙긴 깃털들이/觸手의 귀 곧추잡고 비늘터는 어둠 저 끝/오늘도 한기둥 나무로 서서 다시묻는 내 안부여.//빛으로 서는 餘白 둘레 둘레 잎 모우고/부채살 이우는 가지 무지개빛 새살이 돋아/그 맥박 거친 숨소리 결 고르는 쪽 빛 하늘.//태고의 허물벗고 다시 서는 오늘앞에 /이제 막 깨어난 눈빛 새筍돋는 풀꽃 바다/숲은 숲, 바다는 바다 아~꺼지지 않는 생명이여.

<1988년 시조부문 당선작-홍승표의 詩새벽, 숲길에서>

<1> 가을 내내 나를 옭아 맨/비밀한 느낌 어디가고/북간도 어디쯤에 있을 나/찾아낼 일이다/그대 영혼 사이 오만하게 스치는/칼바람 볼 일이다/창자에 낀 어둠, 쌓이는 먼지/방금 가슴을 밟고 지나는/포크레인의 흉악한 음성 들을 일이다/후지필름 통안에서 질식사한 개미 한 마리/뚜껑 사이 바스라진/더듬이의 슬픔 볼 일리다/다급한 외침에도/구원은 느린동작으로 오고 있음을/똑똑히 알 일이다/자유는 무한이 될수 없음을 안/서른 넷의 물적증거 소멸할 일이다

<2> 옥상위엔 순백의 자유가 펄럭인다/그리움은 대로를 직진하고/물구나무 선 거리가 나를 압도한다/바닥은 언제나 머리 위에 있고/빙벽엔 발가벗은 내가 부동으로 서 있다/무섭다, 곡기끊긴 사랑과 결박당한 눈물/꿈은 역마살이 끼었는가/뿌리까지 얼게하는 카랑한 냉기/가슴엔 빙산 갈라지는 소리/통사정해도 되돌릴수 없는 시간 쌓이고/오물까지도 저리게 하는 바람/새벽은 내게 간통녀 되기를 강요하고/새들은 날개를 잃었다/회색의 풍선 하나가/지하로 곤두박질한다/모두가 수혈을 기다리는 사람 뿐/우체부는 발길을 끊고/전화는 수리 중/밤은 그뭄 밤,/누군가의 흐느낌 소리 들어야하는 밤도/이미 쉼표는 아니다.

<1989년 시부문 당선작 김인자의 詩겨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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