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제사와 상투

이진호

발행일 2018-02-01 제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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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원 시절 양반같이 돈에 집착 불법 저질러
역대 권력자 깨끗한 임기 마무리 약속했지만
의지·실천없어 우리사회 병폐 나아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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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호 인천본사 사회부장
'한양 부자 변 씨에게 일만 냥을 빌린 허 생원, 과일과 말총 장사로 큰돈을 벌어 무인도를 사다.'

17세기 후반 조선 팔도를 뜨겁게 달군 희대의 경제사건이 벌어졌다. 무일푼으로 끼니조차 잇지 못하던 생원 한 명이 단시간 내 100만 냥을 벌어 도적무리를 교화해 먹거리와 살 곳을 마련해주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다는 얘기가 전국적인 이슈로 떠올랐다.

조선 후기 부(富)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허 생원의 일화는 대략 이렇다. 가난한 살림에 글만 읽던 허 생원은 어느 날 돈을 벌어 오라는 부인의 핀잔을 듣고 한양 최고 부자인 변 씨에게 만 냥을 빌린다. 그는 경기도 안성으로 내려가 모든 종류의 과일을 모조리 사들였다. 그러자 과일이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때 허 생원은 갖고 있던 과일을 시장에 내다 팔고 목돈을 쥐게 된다. 허 생원은 이 돈을 들고 제주도로 가서 말총(선비들의 상투에 쓰는 망건의 재료. 말의 목에 있는 갈기나 꼬리에 있는 털)을 모두 사들였다. 그는 상투를 틀지 못한 선비들에게 말총을 비싸게 팔아 또 한 번 큰돈을 번다.

허 생원은 그렇게 번 돈으로 섬 하나를 산다. 그는 도적들을 찾아가 소 한 마리와 여자 한 명을 데리고 와서 자신이 사들인 섬에서 살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온 나라의 도적들이 섬으로 들어가자 나라가 조용하고 평화로워졌다. 이곳에서 도적들과 3년간 농사를 짓던 허 생원은 지금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에 흉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동안 거둔 곡식을 팔아 백만 냥을 벌었다. 그는 이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변 씨에게 빌린 돈의 열 배인 십만 냥을 갚는다. 연암 박지원의 한문 소설인 '허생전(許生傳)'의 한 대목을 살짝 각색해봤다.

허 생원은 '사재기'와 '독점'으로 큰돈을 벌었다. 요즘 같으면 '도덕적 해이'나 '불법성 투기'라는 비난을 받았을 법한 일이다. 사안에 따라선 처벌받거나 과징금을 물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시 양반들이 목숨같이 떠받들고 있던 유교의 주요한 덕목인 '제사'와 '상투'의 폐해를 지적하고 있다. 조상을 기리는(제사) 것과 부모가 물려준 신체를 가꾸(상투)는 것은 유교사상의 근본인 예(禮)와 효(孝)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하지만 사회를 이끌어 가야 할 양반들이 내실 없는 형식에만 너무 얽매이다 보니 나라 살림은 점점 피폐해지고, 백성의 고통은 더 깊어져만 갔다. 실학자 박지원은 이런 세태를 비판하고 백성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으로 보인다. 소설 속 허 생원이 양반들이 소중히 여기는 약점(제사와 상투)을 이용해 돈을 모아 가난을 구제한 것도 소위 지도층이라고 하는 양반의 무능을 꼬집은 것이다.

이 시대에도 허 생원이 살던 시절의 양반과 유사한 사회지도층이 존재한다. 내실 없는 형식에 갇혀 있던 조선 시대 양반들은 그사이 그들의 지위를 이용해 재력가로 변신했다. 일부 돈에 눈이 먼 현시대 양반들은 목숨처럼 여기는 '돈(錢)'을 지키려고 불법도 서슴지 않고 있다. 그뿐인가. 늘 그랬듯이 최고 권력은 세무·사법· 특혜라는 칼을 휘둘러 압박했고, 그런 권력에 기대려고 검은 뒷돈이 오갔다. 어느 해를 가릴 것 없이 권력과 연루된 각종 비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역대 모든 권력자는 취임사에서 정경유착의 비리를 척결하고, 깨끗하게 임기를 마무리하겠다고 다짐했다. 특혜를 주거나 검은돈을 받는 일도 절대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일한 만큼 대우받는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수 없이 다짐만 하면 무얼 하겠는가. 의지와 실천 없는 한 우리 사회의 병폐는 절대로 나아질 수 없다.

/이진호 인천본사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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