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그들, 3·1운동을 말하다!·(1)미서훈 독립운동가 '차경규']전국 최초 日 순사 처단… 무력저항 선봉에 서다

김학석·공지영 기자

발행일 2018-02-21 제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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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차경규 선생과 차경규 선생의 시회활동을 보여주는 시집. /화성시청 제공

화성 시골청년 면사무소 파괴등 앞장서
일제에 체포 고문 후유증에도 후학양성
독립운동 문서 어린시절 이름으로 적혀
동일인물 증명할 족보없어 인정 못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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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갈비를 만지면 이렇게 부러진 게 나타나. 뼈가 툭툭 튀어나온 거지. 그렇게 몸이 안 좋으니 농사일도 거의 못하셨어. 가난하게 살았다고."

아버지를 떠올리면 부러진 갈비뼈를 움켜쥐고 조용히 책을 읽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독립운동가 차경규의 막내아들 차진모씨는 아버지를 그리 회상했다.

"아버지는 자기 자랑을 안하셨어.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 우리 어머니한테 들은 거야. 정작 본인은 만세 부르고 고문 당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어."

생전에도 차경규는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반대했다.

"나라 잃은 민족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그것이 자랑할 일인가." 평생 고문 후유증과 가난을 이고 살았지만 차경규는 결코 비굴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다.

1919년 4월 3·1운동이 전국에 퍼지던 때, 화성의 시골청년 차경규는 당시 차희식, 차병혁, 차병한, 윤영선과 함께 화성 석포리 인근 주민을 이끌고 무봉산에 올라 횃불시위를 벌였다. 그의 나이 22세때다.

차진모씨는 "삼일만세운동이 벌어지자 분연히 일어난 거야. 시골청년이지만, 학식이 뛰어났고 의식이 있었어. 똑똑한 청년이니까 동네 청년을 규합해 만세를 부르자고 모은 거지"라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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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경규는 주민들과 함께 일제에 협력하는 장안면사무소로 달려갔다.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에 당시 장안면장이었던 김현묵은 '차봉구(차경규의 아명)가 들어와 옆구리 배를 쿡쿡 찌르고 험악한 얼굴로 가겠는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면서 협박을 했다…나를 전후좌우에서 에워싸고 면사무소를 파괴하기 시작했다'고 당시 상황을 진술한 것이 담겼다.

이어 우정면사무소와 화수주재소까지 파괴하고 일본순사 가와바다를 타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그 선두에 차경규가 있었다.

이정일 화성시 학예연구사는 "전국 최초로 일본 순사를 처단한 것인데, 이것이 시발점이 돼 전국 곳곳의 시위 양상이 바뀌었다. 겁을 먹은 일제가 화성지역 곳곳에 제암리교회사건 같은 대규모 학살을 벌였다"며 "일제의 탄압에 민중 스스로 무력저항한 최초의 사례"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후 차경규는 아내의 오빠가 사는 남양 신남리로 은신처를 옮겼다.

하지만 마을사람의 밀고로 같은 해 7월 체포돼 죽기 직전이 돼서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겨우 살아났지만 고문 후유증과 일제의 감시로 농사일조차 여의치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차진모씨는"아버지가 서당을 차리셨어. 후학양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 근데 동네 사람들이 곱게 보질 않아. 아버지가 요시찰 인물이었으니. 마을에 친일파들도 많았는데, 일제와 타협하지 않은 아버지를 질시했다고. 그래서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가르치고 그랬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숨겨진 독립운동가다. 독립운동을 증명해 줄 문서에 '차봉구'라 적혀 있어서다.

동네 주민 모두 차봉구가 차경규의 아명(어린 시절 이름)이라는 것을 알지만, 동일인물임을 증명하는 방법은 족보와 같은 문서로만 가능하다.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주민들의 심문조서에 "차봉구가 주도해서 나갔다"는 진술이 수두룩하지만 업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렇게 차경규의 장남은 아버지의 활동이 재평가되길 애쓰다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은 막내아들 차진모씨는 올해 일흔아홉이다.

/김학석·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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