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48]한국생사-6 역사속으로 사라지다

내리막길 시작된 경영권 승계

이한구 기자

발행일 2018-02-27 제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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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생사
한국생사는 해외 수요가 높을 것으로 예상한 실크수출에 주력했지만 2세 경영을 시작하고 김지태 사장이 타계하면서 경영난을 겪었고 결국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사진은 당시 생산한 각종제품들. /'김지태사장창업35년사' 수록

다각화 없이 실크 산업만 고수
1977년 1억5천만달러 수출 훈장
김지태 타계 이후 모기업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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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과 함께 부정축재환수금 완납, 언론기관 국가헌납 등의 시련에도 김지태는 실크재벌 외길을 고수했다.

합섬섬유의 보급과 실크수요가 둔화하는 등 견직산업이 점차 사양화했으나 김지태는 나일론은 주로 서민용일 뿐 중류층 이상에서는 천연섬유인 실크가 여전히 유망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한국의 비단은 품질이 뛰어나 해외수요가 상당하다는데 주목, 수출에 주력한 결과 1966년에는 실크수출 500만달러를 기록했다.

김지태는 한국생사와 조선견직, 삼화고무를 3대 기간사업으로 하는 실크재벌로 회자됐는데 3개 업체의 종업원은 8천여명에 연 매출액은 당시 20억원대(약 660억원)를 기록했다.

당시 국내 신흥재벌들은 미국과 유럽, 일본 등으로부터의 해외차관 붐에 편승해 다각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었다. 김지태의 주변에서도 사업 다각화를 권유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김지태는 "일인일업(一人一業)이 나의 모토다. 나도 젊었을 때는 여러 분야에 손을 뻗쳐봤지만 결국 깨달은 것은 일인일업이더라."('김지태사장창업35년사', 155면)

한국생사그룹은 1960~1970년대 수출드라이브정책에 편승해 고속질주했다. 1970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은 20여명의 수출 유공 기업인들에게 산업훈장을 수여했는데, 김지태는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대망의 수출 100억달러를 돌파한 1977년말 수출의 날 행사에서 김지태는 1억5천만달러를 수출한 공로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한편 이 무렵부터 2세 경영이 개시됐다. 김지태는 슬하에 총 6남3녀를 뒀는데 1972년부터 아들들을 각 계열사의 대표로 임명했다.

연세대 상대를 졸업한 장남 영구에겐 조선견직을,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차남 영우에겐 한국생사를 그리고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삼남 영주에겐 (주)삼화를 맡기면서 김지태는 경영일선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한국생사그룹의 경영사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주)삼화는 신발 수출이 활기를 띤 덕분에 1977년에 종합무역상사에 지정됐으나 대규모 부실채권이 발생해 1979년에 은행관리를 받았다.

한국생사와 조선견직도 사정이 비슷했다. 김지태는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을 담보로 제공해 세 회사가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게 해줬다. 그런데 이들 3사가 은행에서 빌린 돈을 채 갚지 못한 상태에서 1982년 4월에 김지태가 타계했다.

세무서와 유족들간 상속세액을 놓고 1984년부터 3년여 동안 지루한 소송전을 전개한 결과 1986년 12월 대법원은 최종 유족들의 손을 들어 주었으나 1992년에 모기업인 한국생사가 부도를 맞았다.

조선견직도 점차 죽어갔다. 1966년 말부터 나일론과 테트론 등 화학 섬유가 보급되고 인조 양단이 등장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견직은 1985년에 부산 연제구 거제동의 공장을 매각하는 등 하청 생산 위주로 운영됐고, 1995년에는 중국 이전을 시도했으나 이마저 실패했다.

한국생사그룹이 언론에 다시 주목받은 것은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였다. 노 대통령은 김지태의 부산상고 후배였다. 참여정부는 과거 정권의 비인륜적 사건을 조사하겠다며 2005년 5월 국회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을 제정하고, 그해 연말 4년 한시(限時)기구로 '진실화해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국가정보원은 따로 '과거사위원회'를 조직했다. 유족들의 청구에 따라 국정원 과거사위는 김지태 창업주의 재산 헌납 과정에 대해 조사했으나 박정희 정부가 재산을 강탈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 오히려 김지태가 재산 헌납으로 처벌을 면하려 한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2007년 5월29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부일장학회가 박정희 정권에 강제 헌납된 것으로 결론 내리고 재산을 원소유주에게 돌려주라고 정부에 권고했다.

한국생사그룹은 귀속기업 불하를 통해 재벌화를 도모한 전형이었다. 또한 정치와 사업의 병행을 통해 재벌로 성장한 특이한 사례다.

그러나 1950년대에 사업의 기틀은 완비했던 대부분의 재벌들이 1960년대 이후 시류에 편승해 외형을 불린 결과 계속 기업화 내지 확대재생산에 성공한 반면 한국생사는 그렇지 못했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군사정부와의 소원한 관계 탓에 정부주도의 수입대체 공업화와 수출드라이브 등에 편승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 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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