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49]삼성-1 사업과의 인연

부동산 실패후 삼성상회로 새 출발

이한구 기자

발행일 2018-03-06 제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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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생가
이병철 생가

1천석 지기 집안 막내 이병철
중일전쟁 당시 만주서 무역업
'별표 국수' 인기 24시간 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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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은 일본의 한국강점 6개월 전인 1910년 2월12일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1천석 지기 이찬우의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로 이병철의 16대 조부가 이곳에 터전을 잡은 후 대대로 뿌리를 내린 곳이다. 유학자인 조부 이홍석은 문산정을 세워 후학을 양성했을 뿐 아니라 당대에 재산을 1천여석으로 불리는 등 이재에도 밝았다.

이병철은 5세 때부터 문산정에서 한학을 연마한 후 1922년부터 진주의 지수보통학교와 서울 수송보통학교를 거쳐 중동중학 속성과를 수료했다.

1921년 개교한 지수보통학교는 이병철 및 구인회(LG 창업자), 허준구(GS그룹) 등을 배출한 곳으로 교정에는 이병철과 구인회가 심었다는 수령 90년의 노송 2그루가 버티고 있다.

이병철은 1930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전문부 정경과에 진학했으나 각기병을 앓아 2학년 가을에 학업을 포기했다. 그는 '호암자전'에서 "지수보통학교, 서울의 수송보통학교와 중동학교로 이어지는 네 번째 중퇴로 나에게는 졸업증서라는 것이 한 장도 없다"고 술회했다.

그러면서 "나는 어릴 때부터 출중하다는 말을 별로 듣지 못했다. 그러나 산수과목은 늘 학급에서 상위권을 유지하는 등 자신 있었을 뿐 아니라 특히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다"고 회고했다.

이병철은 1936년 경남 마산에서 동업자 정현용, 박정원 등과 각 1만원을 출자해 자본금 3만원의 협동정미소를 설립했다.

이병철은 부친으로부터 쌀 300석(5만원)을 받아 창업자금으로 활용했다. 당시는 제2차 산미증식계획기로 일본에 대한 국내산 쌀의 수출 절정기였다.

김해평야를 배후지로 둔 마산은 호남평야 최대의 수출항인 군산, 목포와 함께 미곡의 일본수출 전진기지로 도정물량이 풍부했다. 또한 일본인 소유의 마산일출자동차(주)를 인수, 트럭 20대 규모의 화물운송도 겸했는데 경영은 성공적이었다.

이병철은 정미소 경영으로 벌어들인 이익금과 저리의 식산은행 대출금으로 부동산 투기를 시작, 김해지역의 논과 밭 등을 싼값으로 매입한 뒤 비싸게 파는 방법으로 거금을 모았다.

특히 저리의 은행자금을 동원해 부동산거래를 통해 경남 일대의 경작지 200만평을 확보한 대지주가 됐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쌀값 폭락에다 식산은행 대출중단에 따른 자금난으로 부동산 투기를 청산했다. 이병철의 사업가 경력에서 최초의 사업실패였다.

1938년에는 대구에서 상권이 가장 큰 서문시장 부근 견정(堅町, 인교동) 61-1의 연건평 250평의 4층, 지하 1층짜리 건물을 2만원에 구입해 살림집 겸 사무실을 마련하고 자본금 3만원의 삼성상회를 설립했다. 자본금 3만원은 요즘 가치로 2억여원에 해당한다.

삼성 로고
삼성의 '삼(三)'은 큰 것·많은 것·강한 것을, '성(星)'은 밝고 높으며 영원히 빛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체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약간의 의문이 있다. 1941년판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 738면에 '삼성합자회사(三星合資會社)'가 등장하는데 이 자료는 동아경제시보사가 해마다 조선의 경제실태를 파악하고자 조선금융조합연합회, 각종 산업조합, 수리조합, 공업조합 등의 유관기관들이 제공한 자료들을 정리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삼성합자회사는 이길생이 1938년 5월9일 대구시 견정 61번지에서 식료품관계 물품 도소매를 목적으로 설립했는데 자본금이 1941년 당시 1만원이다.

상호는 물론 회사의 주소지와 설립연도가 같음은 물론 사업내용까지 동일해 삼성합자회사는 이병철이 1938년 설립한 자본금 3만원의 삼성상회로 짐작된다.

이길생은 이병철의 또 다른 이름이거나 혹은 창씨 개명의 일환으로 바꾼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병철은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을 계기로 만주지역에 대한 무역업을 개시했다. 일본 유학시절에 동문수학했던 경남 합천 출신의 이순근을 지배인으로 영입해 내부관리를 맡기고 자신은 은행융자와 상담업무를 담당했다.

삼성 최초 국수
삼성 최초 국수 /'삼성50년사' 수록
직원수가 40여명에 달할 정도로 사업이 잘됐다. 창업초기부터 사과 등 청과물취급과 함께 국수도 제조 판매했는데 삼성상회가 만든 '별표국수'는 인기가 높아 24시간 쉬지 않고 제면기를 가동했다.

주 고객은 안동, 봉화 등지에서 온 도매상들로 삼성상회의 하루 국수생산량은 100상자 이상이었다.

 

한 상자는 국수 60다발씩 포장됐는데 한 다발의 가격은 10전이었고 한 달 매출액은 2천원 내외로 현재 가치로 1천100만여원이었다.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친은 삼성상회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전 전 대통령의 가족은 삼성상회 앞 개천 너머 빈민촌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부친이 삼성상회에서 품팔이를 했던 것이다.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는 이런 인연으로 비슷한 또래의 전두환과 어울렸다고 술회했다. 이맹희는 수창국민학교를 졸업하고 6년제의 경북중학교에 진학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롯 김복동, 정호용, 김윤환, 유수호 전 의원과 감상조 전 경북도지사 등이 이맹희의 경북중학교 동기동창들이었다. ('묻어둔 이야기')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 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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