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51]삼성-3 제일제당 설립

'40년간 수입제한' 그룹 기반된 설탕 과점

이한구 기자

발행일 2018-03-20 제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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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수입 대체 공업화 기회
부산 설탕공장 설립후 급성장
제분겸영 '삼백산업' 호황 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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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은 새로운 사업구상에 몰두했는데 동기는 광복 이후 극심한 물자부족과 막대한 원조물자 때문이었다.

정부는 해외에서 제공된 원조불과 원조물자를 민생안정과 전재복구에 우선 배정함으로써 수입 대체 공업화의 기폭제가 됐는데 이를 계기로 기업활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그 와중에 정경유착 관행도 자리 잡았다. 정부가 경제적 자원의 선택적 배분과 관련해 자유당 정치인 및 관료 등과 기업가들 간에 블랙커넥션이 형성된 것이다.

이병철은 원당이 원조물자로 국내에 대량 공급되고 있던 점을 착안해 설탕 제조에 착수했다. 설탕이란 액체인 원당을 적당히 가공하면 생산이 가능해 기술적으로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설탕은 대중적인 소비에 힘입어 수요는 날로 증가했으나 국내생산은 전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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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제당 부산공장. /'삼성50년사' 수록

공장설립에 필요한 외화 18만 달러를 정부협조로 특별대부 받고 2천만환은 상공은행으로부터 대출받았다. 부산 전포동의 고무공장 부지 3천305㎡(1천평)를 확보하고 제당설비 일체는 일본에 발주, 1953년 6월 자본금 2천만환의 제일제당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연건평 1천41㎡(315평)의 제당 공장은 하루 25t의 설탕을 생산하도록 설계됐는데 그해 11월부터 설탕을 생산했다. 국내 최초의 설탕 공장은 이렇게 탄생했는데 제일제당의 설립은 수입 대체 공업화의 성공 가능성을 확인해준 쾌거이기도 했다.

이 무렵 수입산 설탕 가격이 근당 300환인 반면 제일제당 제품은 100환이었다. 비록 품질 면에선 외제에 못 미친다 해도 가격이 매우 저렴한데다 수요가 격증하는 추세여서 제일제당은 생산개시 6개월 만에 생산시설을 확대했다.

제일제당은 국내 설탕 소비량의 33.3%를 공급할 정도로 급성장, 설립 1년 만에 흑자를 시현했으며 1955년에는 자본금을 20억환으로 증가하는 등 삼성의 주력 기업으로 부상했다.

제일제당이 단기간에 성공하자 이에 자극받은 다수 기업이 제당업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삼성 로고
1954년 8월에는 동양 제당과 한국 제당이, 1955년에는 삼양사가 제당 공장을 각각 지었으며 1956년에는 금성 제당, 해태제과, 대동 제당 등이 잇따라 설립됐다.

그 결과 국내 설탕 시장은 1955년부터 공급과잉상태에 직면했다. 제당 업체 간에 덤핑 등 치열한 이전투구 끝인 1958년의 국내시장은 제일제당, 삼양사, 대한제당(대동제당의 후신) 등의 과점체제를 형성했다.

이후부터 제당 업체 간에 담합 혹은 정경유착 의혹들이 불거졌다.

정부는 수입 대체 공업화를 명분으로 제일제당이 설립된 1953년부터 1993년까지 40년 동안 일관되게 설탕을 수입제한품목으로 지정해 설탕 수입을 금지했는데 이를 근거로 제당 업체들은 초과이윤을 누렸다.

1950년대 중반에는 제당, 제분, 면방직 등의 소위 '삼백'산업이 국내 경제를 선도하는 소위 '삼백경기'가 도래했다.

제일제당은 식품 중심의 다변화에 착수해 1956년 4월에는 동성물산(주)의 소유인 포항 구룡포의 통조림공장(펭귄표)을 인수했다.

또한 1957년 10월에는 제분공장을 건설하고 제분업도 겸영했는데 이 사업 역시 호황을 구가했다. 삼성은 이중 제당과 제분에 뛰어들어 그룹의 기반을 확보했던 것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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