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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 너무 가난해서 생전에 제대로 된 전시 한번 못했던 화가. 51세에 요절한 박수근이 김복순에게 보낸 청혼 러브레터는 지금 읽어도 가슴이 먹먹하다.

박수근은 가난한 화가였다. 여름에도 겨울 옷을 입은 채 그림을 그렸고, 전쟁 중엔 미군 초상화를 그려 주면서 하루하루 연명했다. 20달러에 그림 한 점 팔면 행복했다. 낭만이나 관념 따위는 그에겐 사치였다. 행복하게 해준다던 아내는 툭하면 돈을 꾸러 다녔다. 선생님이 "너희 집은 뭘 해서 먹고 사냐"고 묻자 셋째아들은 "꿔서 먹고 살아요"라고 답했다.

궁핍한 삶이 그대로 작품으로 이어졌다. 절제된 선과 단순한 색을 바탕으로 가난한 서민의 애환을 소박하게 그려냈다. 벌거벗은 고목 나무들, 시장 난전에 좌판을 벌인 아낙, 아이를 둘러업은 어린 소녀 등 한국인의 가장 친밀한 모습을 담아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인기가 높다. 지난주 옥션 경매에서 이중섭의 '소'가 47억원에 낙찰되기 전까지, '빨래터'는 45억2천만원으로 경매가 최고기록을 갖고 있었다.



생전에 가난했으나 사후 그림값이 사상 최고라는 '그림값의 역설'을 증명하는 화가는 많다. 빈센트 반 고흐도 죽기 전까지 그림을 딱 한 점밖에 팔지 못했고, 이중섭도 찢어지게 가난했다. 사후 그림값이 폭등해도 화가는 경제적인 혜택을 누리지 못한 채 평생을 가난에 찌들어 살다 세상을 떠났다.

가난한 미술가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권리를 확대하는 다양한 제도가 도입된다는 소식이다. 가장 관심을 끄는 건 '추급권'이다. 팔린 화가의 작품이 또 다른 이에게 재판매될 때 그 대금 중 일부를 작가나 저작권을 가진 유족이 배분받을 수 있는 권리다. 유럽에선 3천 유로 이상 미술품에 한해 판매가의 0.25∼4%를 작가나 유가족에게 지급하고 있다. 우리도 이 제도가 정착돼 '화가=가난'이라는 등식이 깨지길 기대해 본다.

/이영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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