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55]삼성-7 한비 밀수사건과 이병철의 퇴진

박정희와의 '짧은 밀월 긴 갈등'

이한구 기자

발행일 2018-04-17 제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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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신변문제 책임진다" 약속
日서 귀국해 비료공장 건설 착수
최대시련 '사카린' 터져 결국 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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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6월 8일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이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찾아와 "경제의 '경'자도 아는 건 실업인들뿐이니 그들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극동해운의 남궁련 사장을 한번 만나 조언을 들어보는 게 좋겠습니다." 김종필 부장은 그날 밤 예고도 없이 남궁 사장의 집을 찾아 '기업인들을 활용해서 경제 재건을 하려고 하는 데 조언 좀 해 달라'고 요청했다.

남궁 사장의 논지는 분명했다. "'도둑질도 해본 놈이 잘한다'는 속담이 있지 않소. 혁명정부가 경제 재건을 최우선으로 하려는 모양인데 그 사람들을 잡아넣으면 경제활동은 누가 하겠습니까."

김종필 부장은 재일거류민단 권일 단장을 통해 일본에 체류 중인 이병철 사장에게 '신변문제는 내가 책임질 테니 걱정 말고 빨리 한국으로 돌아와 경제발전에 일익을 담당해 주시라'고 전해 이 사장은 6월 26일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그날 밤 서울 명동 메트로호텔 2층 방에서 김 부장은 이병철로부터 '적극 협조하겠다'는 확약을 받았다.('김종필 증언록1', 2016, 282~285면)

이렇게 해서 군사정부는 과거 자유당 정부에서 성장한 재벌들과의 강한 연결고리를 형성했다. 이후 정부는 경제개발이란 슬로건으로 강도 높게 그리고 명시적으로 재벌들을 육성했다.

이병철에게 비료공장 건설은 숙원사업이었다.

"내 생전에 큰 비료공장만 하나 지으면 후회가 없을 것 같다."(이맹희, '묻어둔 이야기') 당시 국내에는 충주비료, 호남비료, 삼척산업, 경기화학에서 비료를 생산했으나 총생산량이 국내 비료수요의 20%에 불과해 매년 막대한 물량을 해외에서 수입해야 했다.

1950년대 초반 이병철은 이승만 대통령과의 면담을 거쳐 정부 지불 보증의 해외차관을 들여와 연산 10만t의 비료공장을 짓기로 확정했다.

그러나 국내 정치적 불안으로 8년여 동안 허송세월을 보냈는데 5·16쿠데타를 계기로 비료공장 건설사업이 구체화됐다.

혁명정부는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기업인들에게 1963년까지 자신들에 맞는 공장을 건립하도록 지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병철에게 비료공장 건설을 강요했다.

1963년 12월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4년 후 대통령선거에서 재차 당선되기 위해선 비료공장 건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농촌 인구수가 압도적으로 많아 비료공장을 지어 농민들에게 비료를 헐값으로 공급하면 농촌유권자들을 손쉽게 끌어들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1964년 후반 박 대통령은 67년 대통령선거 이전에 비료공장 건설을 완료하도록 당부했다.

1964년 연산 33만t 규모의 요소비료를 생산할 목적으로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한화정밀화학)가 설립됐다. 1965년 12월부터 울산공단 내에 연산 33만t의 비료공장 건설작업을 개시했다.

국내 비료수요의 80%가량을 커버하는 세계최대의 비료공장이었다.

이병철은 정부로부터 차관교섭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은 한편 일본 미쓰이그룹과의 접촉을 통해 연리 5.5%에 2년 거치 8년 상환의 차관 4천200만달러를 확보했다. 단일 공장 건설에 4천만달러 이상을 도입하는 경우도 최초였다.

공장건설에는 미쓰이물산 계열인 동양엔지니어링 외에 국내의 현대건설, 대림산업 등이 참여했는데 건설 착수 1년여 만인 1966년 9월 15일 국내 언론사들이 일제히 삼성의 밀수사건을 터뜨렸다.

9월 16일 국세청이 발표한 조사내용 중 일부다. "밀수사건의 주모자는 한비의 상무이사로 근무하던 이일섭이며 주소불명의 이창식과 공모해 사카린 원료인 OTSA 2천400부대를 지난 5월 5일 울산에 입항한 일본 선박 신슈우마루로 건설자재와 같이 밀수입했다.

주모자 이일섭은 5월 16일 시가 101만원에 해당하는 141부대를 시중에 매각했으며 뒤이어 1천430부대를 부산시 동래구 소재 금북화학공업(주)에서 정상 수입품인 것처럼 매각하려다 5월 19일 부산세관에 의해 적발됐다."

당시 신문들은 일제히 비분강개조의 비판을 쏟아낸다. 겉으로는 '사업보국'운운하면서 어떻게 밀수를 할 수 있냐는 비판이었다. 이후부터 45일간 삼성은 사정기관 조사와 매스컴의 집중공격을 받아 만신창이가 됐다.

'장군의 아들' 김두환 국회의원은 9월 22일 한비밀수 관련 국회보고회에서 국무총리와 장관들에게 재벌을 옹호한다며 오물을 투척해 국내외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10월 15일 대구에서 있었던 '재벌기업 삼성 밀수 규탄대회'에서 잡지 '사상계'의 장준하 사장은 "박정희야 말로 밀수 왕초"라 발언했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이병철의 차남 이창희(가명 이창식)와 이일섭 상무가 9월 27일에 구속됐다. 이에 대해 삼성은 할 말이 많다. 설탕을 생산하는 제일제당을 경영하는 처지에 가격이 극히 저렴한 대체재인 사카린을 수입해서 시판하면 설탕을 어떻게 판매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1967년 10월 11일 한국비료는 국가에 헌납됐다.

이병철은 한비의 개인지분 51%를 정부에 기부하는 절차를 밟았다. 10월 22일 이병철은 기자회견을 열어 "한비를 국가에 헌납한다"는 것과 "경제계에서 은퇴한다"고 발표해 이 사건을 잠재웠다. 이후 박정희 정부와 삼성 간에는 불편한 관계로 반전됐다.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는 이를 두고 '짧은 밀월, 긴 갈등'으로 정리했다. 한비밀수사건은 삼성의 창업 이래 최대의 시련이었던 것이다. 이병철의 '정치권과는 불가원불가근(不可遠不可近)'이란 경영철학도 이를 계기로 확립됐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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