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철 칼럼]사회적 민주주의로 문열기

윤상철

발행일 2018-04-17 제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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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차별·지배 쉽게 발견되지만
찰과 상처럼 취급돼 방치되기 쉬워
미봉적 타협 불과한 민주주의조차
제대로 실현하기에는 항상 어렵고
깊은 민주주의 실현 더더욱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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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이른바 '제3의 물결' 민주화가 1970년대 중후반부터 20여년 이상 전 지구를 휩쓸었다. 대표적 민주주의 논자였던 길레르모 오도넬은 민주주의를 3차원으로 나누고, 정치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로의 문열기에 불과하고 경제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민주주의로 확산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많은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정치적으로 의례화한 최소요건 민주주의로 전락했다. 경제적 민주화는 신자유주의의 지구적 지배상황에서 저항의 주체들이 약화되면서 정체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민주주의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민주화 이전의 상황을 보자. 권위주의적 가족 안에서 명령하는 아버지와 복종하는 자식이 있고, 어머니는 그 갈등관리에 지쳐 있다. 기업조직 안에서는 권위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고, 임용 및 인사 과정의 시혜를 미끼로 성적 지배와 학대까지도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교회 안에서는 신처럼 군림하는 성직자와 힘없는 평신도들 사이에서 교리해석과 신앙행위에 대한 독점적 지배관계가 자연스럽다. 지역 간에도 패권주의적 지배와 실리적 복종이 요구된다. 학교 안에서도 봉건적 권위주의와 자본주의적 교환으로 구성되는 교사와 학생 간의 비민주적 관계가 발견된다. 세대 간에도 노동현장에서도 이 모든 전(前)민주주의적, 비민주주의적 관행이 여전하다.

우리가 아는 한, 체제의 이행은 단속적이다. 역전되기도 하고 건너뛰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체제진전이 그들에게 준 자존감과 행복감을 기억하고 이행의 지속을 선호한다. 따라서 경제적 민주주의가 정체하더라도 사회적 민주주의의 진전은 계속된다. 지역불균형 발전을 극복하고 지역차별과 패권을 철폐하는 일은 지속 될 것이다. 노동자이든 근로자이든 차이를 가르는 명명들이 존재할지라도 노동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감소될 것이다. #Me Too를 내걸든 #With You를 내걸든 권력과 결부된 성적 차별과 폭력은 결단코 사라져 갈 것이다. 기대에 미흡하더라도 그 진전으로 인간의 품격이 높아진다면 사람들은 계속 나아갈 것이다.

모두가 다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해하지 말라고 말한다. 가해자들에게도 인격과 권리가 있고 사법적 판단 이전에 여론 재판을 가하지 말라고 한다. 스스로를 해명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고 가해자들을 옹호하기도 한다. 가해자에게도 가족이 있고 그들의 인권은 중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피해자들은 너무 어리고 판단 능력을 갖지 못할 수 있다고 한다. 여전히 권력을 가진 자들의 반격과 역주행에 유의하라고 충고한다. 심지어 다른 소수자들의 권리를 인식하고 그들의 상처와 피해까지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더 시선을 넓혀 다른 소수자와 연대하여 더 큰 민주주의를 이루라고 한다. 어떤 정치적 음모가 있다고 속삭이고,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를 줍고 있다고 핀잔하기도 한다.

수용하기도 비난하기도 쉽지 않은 이러한 언설에 대해, 한 방송인의 말이 와 닿는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이제 그만 좀 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슬픔의 기한은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라, 유가족의 눈물이 멈출 때까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차별에 상처받은 이들에게 시한을 정하지 마라. 또한 사람들은 변증법적 발전을 상식적으로 수용한다. 다소 격하게 보이더라도 관행처럼 익숙해진 것들을 변화시키려면 그야말로 '역편향'까지도 수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폭력적 혁명의 최종적 결과는 별로 진보적이지 않은 민주주의이듯이 아직 크게 변하지도 않은 차별을 뿌리뽑기 위한 사회적 노력에 법과 제도에 근거한 차분하고 점잖은 태도를 조언하지 마라. 아직 아물지도 않은 자기 상처를 치유하기에 몰입하는 이들에게 다른 이들의 상처까지도 전가하지 마라. 각자 자기 상처의 고통을 말하면서 다소 불균형적 치유가 흡족하지 않더라도 보이는 것은 일단 치료하고 보자.

단 한 번의 촛불집회로 민주주의는 완성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 촛불집회를 야기한 농단조차도 쉽게 철폐되지 않는다. 사회적 문화와 관행에 깊이 녹아들어가 있는 차별과 지배는 쉽게 발견되지만, 찰과상처럼 취급되기 쉬워서 무관심과 방치의 대상이 되기 쉽다. 찰과상에 몰두해있는 아이를 가볍게 바라보면서 시선을 바꿀 것을 강요함으로써 그 뿌리까지 제거하기가 쉽지 않다. 모든 것의 출발에 불과한, 그런 의미에서 미봉적 타협에 불과한 민주주의조차 제대로 실현하기는 늘 어렵고 보다 깊은 민주주의는 더더욱 실현하기 어렵다. 신문마다 무수한 기둥(column)들을 세우고 있지만 여전히 사회를 떠받들기는 어렵기만 하다.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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