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56]삼성-8 삼성전자 출범

중화학공업화 편승 '글로벌 삼성' 태동

이한구 기자

발행일 2018-04-24 제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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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에 완공된 삼성전자 수원공장. /'삼성50년사' 수록

박정희 권유에 1960년대 말 착수
9개 설립·8개 인수 '사업 다각화'
자금바탕 급성장 시장 과점업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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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이 한비 밀수사건으로 창업 이래 최대위기를 맞았음에도 삼성의 약진은 계속됐는데 그중 하나는 언론사업 진출이었다.

1960년대 초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을 거치면서 이병철을 비롯한 대표 기업인들이 부패기업인으로 매도된 것에 대한 적극적 변호 내지는 자본주의 체제옹호의 필요성도 있었던 것이다.

1963년 2월 11일 동양텔레비전방송을, 같은 해 6월 25일 라디오서울방송을 연이어 설립한 삼성은 1965년 3월 5일 중앙일보까지 창간하면서 종합매스컴체제를 구축했다.

신문용지 등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 1965년 10월에는 전주제지(한솔제지)를 인수했다.

오늘날 '글로벌 삼성'의 위상을 확립한 또 하나의 사건은 1960년대 말에 착수한 전자산업이다. 장차 국민소득 신장에 따른 내구소비재 수요의 점증을 예상해 1968년 12월 30일 삼성전자(주)를 설립했던 것이다.

'1967년 말 어느 날 중화학공업 쪽에 관심을 쏟던 박정희 대통령이 내(김종필)게 말했다. "이병철 회장한테 이제 중화학공업 좀 해보라고 해. 임자가 가서 의견 좀 물어봐." 이 회장을 만나 대통령 말씀을 전했다.

그는 한참 앉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결심이 섰는지 "대통령을 뵈러 갑시다"라며 일어섰다. 함께 청와대로 들어갔다.

박 대통령은 "조선이나 자동차, 전자공업 중 하나를 해 보시오"라고 제안했다. 이 만남이 계기가 돼 이 회장은 전자공업을 택했다. 그것이 오늘날 삼성전자다'.('김종필 증언록1', 2016, 287면)

삼성전자의 출현에 금성사(LG전자)와 대한전선 등 선발 기업들의 반대여론이 비등했다. 언론도 과잉생산을 우려하며 기존 업체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이에 삼성전자는 생산품 중 일부만 국내에 공급하고 나머지는 전량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정부에 사업허가를 받았다. 삼성전자가 조기에 뿌리내리기 위해선 품질관리 및 부품생산 등 수직계열화를 통한 생산비 인하가 관건이었다.

1969년 10월 수원시 매탄동에 45만평을, 경남 울주군 가천면에 70만평의 공장 부지를 확보했다.

1969년 12월 4일에는 TV 및 라디오수상기 제조를 목적으로 일본의 산요전기, 스미토모상사 등과 합작해 삼성산요전기를 설립했다. 1970년 1월 20일에는 일본 NEC와 합작 삼성NEC를 만들었다.

삼성은 보험업도 강화했다. 삼성이 보험업에 진출한 것은 1958년 2월에 안국화재해상보험(삼성화재)을 인수하면서부터다. 이어 1962년 7월 동방생명(삼성생명)을 인수해 종합보험체제를 확립했다. 삼성은 유통, 의료, 부동산개발사업에도 진출했다.

유통업 진출은 동방생명 인수 때문이었다. 동방생명은 1957년 3월 강의수, 전중윤(삼양라면 창업자) 등이 설립해 창업 1년여 만에 업계 수위를 차지할 정도로 생명보험업계의 기린아였다.

동방생명은 여세를 몰아 1962년 동양화재보험의 대주주가 됐고 같은 해 2월 동남증권을 설립해 종합금융그룹의 기반을 구축했다.

한편 그해 9월 동화백화점을 인수하는 등 다각화를 노렸지만 1963년 초 강의수가 사망하면서 경영난으로 삼성은 동방생명, 동양화재보험과 동화백화점을 한꺼번에 인수해 1963년 11월 동화백화점을 (주)신세계백화점으로 변경했다.

삼성은 1960년대 9개 업체를 설립하고 8개 업체를 인수하는 등 사업을 다각화했다. 주목된 것은 삼성전자, 동양방송, 중앙일보 등은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급성장해 각각 해당 시장의 과점업체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이다.

또한 인수한 기업들의 절대다수도 시장 지배적인 위치에 있어 삼성이 최대재벌로 오르는데 기여했다. 1970년대 삼성의 성장은 눈부셨다. 당시 정부의 중화학공업화에 편승해 1974년 삼성중공업과 삼성석유화학을 각각 설립했다.

특히 삼성은 선발업체인 LG보다 20년 늦게 화학사업에 뛰어들었다. 1972년 이병철은 "미래 성장동력은 중화학에 있다"며 업종을 40%까지 확대하라고 지시했다.

국내 섬유의 70% 이상이 화학섬유인데 원료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터였다.

1974년 가을 삼성 50%, 미국 아모코 35%, 일본석유화학 15% 지분구성의 삼성석유화학을 설립하고 국내외에서 1억달러를 조달해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 내 부지 6만평을 확보, 폴리에스터의 원료인 PTA(고순도텔레프탈산) 공장을 건설했다.

1977년에는 호황업종인 국내건설업 진출을 목적으로 통일건설을 인수하고 중동 건설특수를 겨냥, 삼성 해외건설을 설립해 78년에 유명 해외건설업체인 신원개발을 인수·합병시켰다.

1974년 삼성중공업을 설립해 종합기계 제조사업에 진출했다. 한편 1974년 경남거제도에서 설립된 우진조선은 1기 조선설비공사가 50% 정도 진척된 상태였으나 자금난으로 위기에 처하자 삼성이 우진을 인수해 1977년 4월 22일 납입자본금 27억2천만원의 삼성조선(주)로 상호 변경하고 조선설비도 국제규모로 신속하게 확장했다.

1977년 5월 삼성의 중화학사업 확대차원에서 대단위 철구조물 제작업체인 대성중공업을 인수했다.

동사는 일본의 대성철공소와 제일교포 성해룡이 포항제철 건설수주를 위해 1970년 11월 설립해 서울의 남산타워와 롯데호텔 철조공사를 담당할 정도로 철구조물업계의 선두주자였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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