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59]삼성-11 1988년 제2 창업 선언

세계인들이 한국은 몰라도 삼성은 안다

이한구 기자

발행일 2018-05-29 제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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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이건희 폭탄선언에 신경영 선포
명품TV·애니콜신화 등 1위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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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는 삼성그룹 총수직 승계와 함께 선대 회장과는 차별화된 경영을 시도했다.

이 회장은 1988년 3월 22일 서울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1만3천여명의 삼성그룹 임직원이 모인 삼성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제2 창업을 선언했다.

2000년대 세계 초일류 기업달성을 목표로 '자율경영', '기술중시', '인간경영'의 3가지 제2 창업정신도 발표했다.

1992년 6월부터 삼성경제연구소 내에 정신문화연구팀을 구성하고 삼성의 경영이념을 재정립했는데 새 이념은 '인재와 기술을 바탕으로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해 인류사회에 공헌한다'는 것이었다.

기존의 경영이념인 '사업보국'의 한국 테두리를 넘어 세계인류를 위해 사업하겠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식으로 새로운 CI작업도 병행했다.

1965년 제정한 구(舊) 로고는 국제 감각에 안 맞는다는 지적에 따라 1991년 3월 세계 5대 CI업체의 하나인 L&M사를 선정해 새로운 CI를 도입하는 등 제2 창업에 부응하는 준비작업을 진행했다.

1993년에는 제2 창업 5주년을 맞아 '신경영'을 선포했는데 그해 6월 6~24일까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대규모 임원회의에서 이 회장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든 것을 바꾸라"는 폭탄선언이 배경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18만 삼성인을 책임지고 있는 그룹의 회장으로서 나는 특히 1992년 말부터 등에 땀이 흐를 정도로 절박한 위기감을 느껴왔으며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며 이유를 설명했다.

"21세기에는 1등만 살아남는다. 신용과 이미지를 파는 글로벌시대에 품질은 경쟁력의 가늠자이며 그룹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한 개라도 불량한 제품을 만드는 것은 '회사를 좀 먹는 암적 존재요 경영의 범죄행위'"라는 부연도 첨언했다.

이 회장의 명령은 프랑크푸르트 선언 2주일만인 7월 7일부터 삼성그룹 전 임직원의 출퇴근 시간을 아침 7시 출근, 오후 4시 퇴근제로 전환해 세간에 충격을 줬다.

또 그해 9월 10일 '삼성 신경영; 나부터 변해야 한다'는 내용의 행동 강령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스피드 경영체제도 새롭게 구축했다. 각 관계사가 독자적으로 진행하던 전산 업무를 삼성SDS로 통합했는데 특히 그룹 내 네트워크인 토픽스(TOPICS)를 싱글(SINGLE)로 전환해 정보 공유화를 앞당김은 물론 CAD/CAM도 모습을 일신했다.

협력회사와의 관계도 품질 위주로 재정립했다. 제2창업 선언과 상생경영을 목표로 1988년 11월 11일 '협력회사 외주확대 및 지원방안 3개년 계획(1989~1991)'을 발표했다.

모기업과 협력회사 간 온라인전산망을 설치 운영하는 한편 협력회사에 대한 자금 지원을 위해 100% 현금 결제 실시 및 투자자금 무이자 지원, 기술개선 지원 등도 병행했다.

이때부터 세계적인 명품을 만들자는 움직임도 본격화됐는데 발단은 1991년 2월부터 추진한 '1사1품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를 주관하던 회장비서실 기술팀의 해체로 흐지부지됐다가 'World Best 운동'으로 승화됐다. 1993년 3월 세계 최고의 TV를 만들자는 선언 1년 6개월만인 1994년 8월에 첫 월드베스트제품인 '명품 TV'가 탄생했다.

세계최초로 초평면 브라운관 채용, 수신감도 증폭기와 이중 우퍼(Woofer)스피커시스템 등을 탑재해 당시 시장을 선도하던 일본 소니TV보다 성능, 디자인, 기능부문에서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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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아날로그 휴대폰 '애니콜'. /'삼성 50년사' 수록

'애니콜신화'는 또 다른 개가였다. 국내 휴대폰이 첫 등장한 것은 1984년이었다. 이때부터 10년 동안 국내 휴대폰시장은 미국 모토로라가 석권했다.

삼성, LG 등이 막대한 연구비를 들여 신제품을 내놓았지만 모토로라는 철옹성이었다. 삼성이 모토로라 아성에 도전한 것은 1986년 카폰을 생산하면서부터다.

2년 후인 1988년 9월 국내 최초의 자체개발 휴대폰인 SH-100을 출시해 모토로라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후 꾸준한 신제품 개발과 시장개척으로 10% 남짓의 점유율을 기록했으나 핵심기술 부족으로 잦은 고장과 통화감도 불량으로 소비자로부터 외면당했는데 신경영 선언과 함께 심기일전해서 모토로라에 재도전했다.

1993년 10월 삼성전자의 야심작인 아날로그 휴대폰 SH-700이 시판되면서 서서히 지각변동이 일기 시작했다. 월평균 판매 5천여 대에서 1994년 4월에는 1만6천대로 급증했다.

1994년 10월에는 '애니콜'이란 상표로 신제품 SH-770이 출시되면서 모토로라의 아성을 무너트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시장점유율이 25.8%로 모토로라의 52.5%에 뒤졌으나 1995년 8월 51.5%대 42.1%로 모토로라를 제치고 1위에 등극했다.

1997년 10월부터 상용화된 PCS시장에서도 애니콜신화는 계속돼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쌓아나갔다. 이후 스마트폰 시대가 개막하면서 애니콜신화는 '갤럭시폰신화'로 이어져 삼성의 갤럭시폰은 미국의 '아이폰'과 함께 세계 이동통신시장을 양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84년 64KD램 개발로 서막을 연 삼성의 반도체 성장세는 더욱 괄목했다.

256K D램, 1메가 D램, 4메가 D램을 차례로 개발하면서 선진 업체와의 격차를 좁힌 뒤 1989년 16메가 D램을 선진국 업체와 동시에 개발했다. 1992년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을 개발했고 1996년에는 1기가 D램 개발로 세계 최초로 기가시대를 열었다.

제품을 최초로 개발한 회사가 이를 상용화한 후 반드시 세계시장을 석권한다는 보장이 없다. 삼성은 1984년 9월 64KD램 미국수출로 메모리 반도체시장에 발을 디딘 후 1987년에는 세계반도체시장의 9위에 랭크됐다.

이후에도 공격 경영을 펼친 결과 1993년에는 25억달러를 수출해 세계시장 점유율 10.8%로 1위를 차지하면서 세계 최대의 전자업체로 급부상했다.

미국 포춘지의 세계 500대 기업에 삼성전자는 40위에 랭크됐다. 세계인들이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지는 몰라도 삼성은 알고 있을 정도가 된 것이다.

한국 기업역사 1세기만에 이룬 쾌거여서 의미가 크다. 삼성은 한국인들의 저력을 세계만방에 과시한 모범답안이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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