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있는 에세이

[풍경이 있는 에세이]툇골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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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 K선배 부음 전하려던건
그가 품었던 열망 아무도 몰라줄까봐
조금이나마 증언해주고 싶었기 때문
내가 선생님을 쓸쓸하게 했겠지만
보퉁이 내려놓은 것처럼 후련했다

에세이 김서령1
김서령 소설가
선생님이 사는 마을의 이름은 툇골이었다. 그렇게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 본 것이 얼마 만인가 싶었다. 어쩌면 처음인지도 몰랐다. 짙은 초록과 푸른 초록, 덜 푸른 초록과 연한 초록이 차게 흐르는 개울물 곁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마을이었다. 그 숲 안에 동그마니 앉은 선생님의 집. 그리고 선생님이 손수 지은 조그만 오두막이 곁에 딸려 있었다. 대학 은사님을 뵈러 간 길이었다. 이십 년 만이었다.

"선생님, K선배 기억하세요?" 아쉽게도 선생님은 이십 여 년 전 기억의 문짝을 다 열어젖히지 못했다. "글쎄다. 가물가물한 걸." "예전에요, 선생님이 K선배를 불러다 놓고 그러셨어요. 너는 정말 소설가가 될 거다. 그것도 이 소설로. 정말 멋진 소설을 썼구나, 너는." K선배나 나나 문예창작학과의 순진한 소설가 지망생들이었다. 그날 K선배는 하도 기분이 좋아 바짝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지도 못했다. "그래서, K는 어떻게 지내니? 소설가가 됐고?" 나는 K의 소식을 전했다. 사실 그러려고 툇골까지 간 거였다.

2년 전쯤 나는 낯선 여인의 전화를 받았다. K의 누나였다. "K의 부음을 전하려고요. 동생 휴대폰에 저장된 연락처를 보는데, 들어본 이름이 그쪽 뿐이었어요." K와 나는 1년에 한 번, 2년에 한 번쯤 만났다. 그냥 잊고 살 법도 했는데 그는 소설을 마음에서 도무지 놓지 못했다. 그는 스카우트 제안이 차고 넘치는 웹 기획자였고, 유능한 자유기고가였다. 음악에 문외한인 나였지만 그가 잡지에 쓴 음악 칼럼에 홀랑 빠져 칼럼 속 음악이라면 뭐든 사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청춘의 대부분 동안 소설을 쓰지 못해 안달복달했고 걸핏하면 좁은 방 안에 처박혔다. "딱 1년만 소설만 쓸래. 다른 거 다 접고." 그럴 때 K는 삼겹살집이나 꼬치구이집에 앉아 이십여 년 전 선생님이 건넨 칭찬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나는 삼겹살을 뒤집거나 꼬치구이의 은행알을 빼먹으며 그런 K를 한 번도 말린 적이 없었다. 아직 우리는 젊으니 그런 1년이 자주 와도 괜찮다고, 청춘을 자만했다.



K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혼자 죽었다. 소설이 쓰이지 않아 죽을 만큼 고독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고 그가 천천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 젊은 남자가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아프면 죽기까지 하는 거야?" 친구들에게 K의 부음을 전하며 나는 그렇게 엉뚱한 소리만 했다.

툇골 선생님의 서재는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수천 권의 책들에선 오래된 종이 냄새가 풍겼고 연통을 단 난로가 있었다. 오두막에는 손님들을 위한 침대도 두 개가 있었다. 그 위에 깨끗하게 개어진 이불들. 새침데기 흰 거위 세 마리가 마당을 돌아다녔고 고양이 두 마리도 게으르게 지붕을 타고 넘었다. 노랗게 흐드러진 봄꽃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K한테, 여기에 좀 와서 지내다 가라 그럴 걸 그랬구나. 그랬다면, 여기 산 냄새 맡고 물소리 들으며 산다는 것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인생에 길이 여러 갈래라는 것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고…. 힘겹겠지만 다른 종류의 확신도 가질 수 있었을 것을." 정말 그랬을 텐데. K라면 이곳을 정말 좋아했을 텐데. 그의 고독을 짐작하지 못했던 시간이 몹시도 미안했다. 그가 보지 못하고 떠난 툇골의 풍경이 하나같이 아까웠다.

"나는 그리 좋은 선생이 아니었나 보구나. 좋은 선생이었다면 K가 나를 찾아왔을 텐데 말이지. 많이 미안하네." 내가 K의 소식을 선생님에게 전하려고 했던 건 그를 조금이나마 증언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말해주지 않으면, K가 그렇게 오래 마음에 품고 있었던 열망을 아무도 몰라줄까봐, 늘 K의 열망 속에 존재했던 선생님조차 모를까 봐서였다. 내 이야기가 선생님을 쓸쓸하게 만들었겠지만 나는 보퉁이 하나 내려놓은 것처럼 아주 약간 후련해졌다.

/김서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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