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에서 찾는 고려 1100년의 흔적·5]고려불교의 본산, 경기의 사찰

호법으로 국가틀 세우고 왕실이 지켜준 경기사찰 조선까지 영향력 이어가

장일규 기자

발행일 2018-05-29 제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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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훈요10조 "부처 호위에 의지"
문벌귀족 등장에도 지속 지원
몽골침략후 황폐, 회암사 중창
대장경·불화 대표적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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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불교 국가였다. 태조 왕건은 후대 국왕들에게 유언으로 '훈요10조'를 남겼다.

그는 "우리 국가의 대업은 반드시 모든 부처의 호위에 의지해야 한다"라고 선언하면서, 연등회와 팔관회의 꾸준한 시행을 부탁했다. 그는 호법(護法)을 고려 국가의 안녕과 융성의 기준으로 제시했다.

왕건은 건국 이듬해에 개경을 수도로 삼고서 법왕사·왕륜사 등 사찰 10곳을 창건한 뒤 북한산과 관악산 주변에 중흥사와 삼막사를 창건하거나 수리했다.

찬유, 여엄, 경보 등 왕건에 귀의했던 선승(禪僧)도 개경으로 이어지는 남한강 주변에 고달사, 용문사, 사나사, 회룡사 등을 중창하거나 창건했다. 특히 봉업사는 왕건의 초상화를 모신 여러 사원 가운데 하나로 운영되기도 했다.

후삼국 통일 전후 교선합일(敎禪合一)의 분위기가 확산되자, 교종 사찰도 전통을 이어갔다. 최치원의 '화엄십산' 중 하나인 청담사, 교종 불교를 아우른 선승 탄문과 관련한 장의사와 봉선사, 김제 금산사, 익산 미륵사와 연고된 혜거가 창건한 도봉사 등은 경기의 대표적인 화엄종과 법상종 사찰로 자리했다.

교선 불교의 어울림 속에서, 광종은 고달원, 희양원, 도봉원에만 대장경을 소장하고, 대대로 단절되지 않도록 특별히 명령했다.

도봉사의 흔적은 온전히 확인할 수 없지만, 사방 30리의 사역에 수백 명의 승려가 주석했던 고달사에는 현재 가장 큰 불상 받침돌과 함께 웅장한 크기에 세련된 조각을 담은 승탑이 전하고 있다.

고려 초부터 지금의 경기도 사찰은 왕실의 특별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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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클릭아트
11세기에 경기 사찰의 영향력은 주변 지역으로도 확대되었다.

정현은 칠장사를 창건하고서 삼천사와 도봉사의 법상종을 개경 현화사로 연결했고, 원주 법천사 해린, 김제 금산사 소현과 인주이씨 이자연, 문종의 아들 도생에게도 이어지게 했다.

안산김씨 김은부의 아들 난원은 문종의 아들 의천, 숙종의 아들 징엄을 거쳐, 서봉사에 머물면서 부석사의 화엄사상을 아우른 인종의 아들 덕소에게 화엄과 천태 불교를 전하기도 했다.

문벌 귀족의 등장 속에서도 경기 사찰은 여전히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고려 불교계를 주도했다.

무인정권이 등장하고 연이어 몽골이 침략하자, 경기의 사찰은 여느 지역처럼 대부분 폐허화했다.

1. 양주 회암사터 전경
양주 회암사터 전경. /장일규 교수 제공

다만 교선융합과 유불교섭(儒佛交涉)의 사상 경향이 점차 성행하면서, 지눌과 제자 승형은 현등사와 보광사를 창건하여 중흥의 기반을 마련했다.

14세기에 들어서 지공과 제자 나옹은 꾸준히 회암사를 중창하여, 회암사를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자 경기 불교 중흥의 터전으로 삼았다.

그 뒤 회암사를 중심으로 혜근과 보우는 청룡사와 태고사를 중창하거나 창건했고, 자초도 회룡사와 보광사를 중창하면서 신륵사의 대장경 불사도 이끌었다.

특히 보우와 혜근은 사나사, 고달사와 관계하면서 고려 초 경기 사찰의 사세를 다시 일으켰고, 공민왕은 봉업사를 중창하여 경기 사찰에 담긴 태조 왕건의 위상을 다시 부각했다. 이후 경기 불교계는 태조 이성계와 연고되어 조선 건국에 기여했다.

경기문화재연구원
대장경, 불화로 상징되는 고려 불교는 고려 역사문화를 이룬 한 축이다.

현재 경기도의 사찰은 대체로 흔적만 남은 편이지만, 지리적 조건을 고려한 학술 조사를 통해서 그 진면목을 상세히 알려야 할 필요가 있다.

/장일규 동국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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