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경기]이성산성은 신라시대에 축성됐나

문성호 기자

발행일 2018-06-04 제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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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산성 7
이성산성에서 발굴된 12각 발굴지. /하남문화원 제공

이성산성, 출토 유물 토대 신라시대 축성 추정 등 논란 이어져
풍납토성, 유력 후보지로 떠올랐지만 궁성으로 볼 근거 부족해

■ 이성산성은 신라시대에 축성됐나

한양대 박물관에서 1986년부터 2006년까지 20년 동안 총 12차례에 걸쳐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발굴된 유물의 상당수가 신라가 한산주를 설치한 이후의 것들로 추정되면서 이성산성을 한성백제시대 축성한 성으로 보고 있는 학자들과 의견이 분분한 채 그 정체성이 모호한 상태다.

성내에는 평면적이 약 264㎡가 넘는 대형 장방형 건물을 4개소를 포함해 8각, 9각, 12각 건물지 등 대규모 건물지가 상당수 노출돼 있으며 특히 전국에 분포된 18개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다각형 건물 중 반수 이상이 이성산성에 있어 그 쓰임과 시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이성산성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대체로 굽이 낮은 고배류와 항아리, 인화문토기 등 경질의 기와가 대부분이다.

그 외에도 수십여 점의 벼루와 목간이 출토됐는데, 목간(木簡) 중에는 '남한성(南漢城)'이라는 성의 명칭이 확인돼 이성산성이 남한성 또는 한성이었을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어 보다 연구가 필요한 유적이다.

■ 풍납토성, 왕궁 흔적이 없다

몽촌토성이 최초 위례성의 후보지로 거론 됐었지만, 지난 1997년 풍납토성 내 공사 현장에서 초기 백제의 유물이 다량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풍납토성은 단번에 위례성의 유력한 후보지로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러나 풍납토성이 왕성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궁성으로 볼 수 있을 만한 건물지나 흔적이 나오지 않고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낸 건물터가 발견됐지만, 이것이 궁성이라고 단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개로왕 조에는 위례성이 북쪽 성과 남쪽 성으로 구성돼 있다는 기록을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대입해 재구성한다.

풍납토성(북성)에 있던 개로왕이 고구려의 침입 소식에 아들 문주를 신라로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지만, 불과 7일 만에 풍납토성이 함락되면서 몽촌토성(남성)으로 피신한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성산성이 한성백제의 첫 도읍지라고 보는 시각에서는 이성산성이 남성이 되고 남한산 또는 검단산이 북성으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

이상범 하남문화원 사무국장은 "감일동 고분군이 발굴되면서 송파, 강동뿐만 아니라 하남도 넓은 의미의 위례성에 포함됐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며 "그러나 왕이 살았던 궁성의 위치에 대해선 하남지역의 발굴이 초기 단계에 불과한 만큼 단정 짓기엔 어려움이 많다"고 말했다.

하남/문성호기자 moon23@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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