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1]1990년 꼴찌 LG의 '각성'

분노한 팬 '청문회 소동' 후 8연승

경인일보

발행일 2018-06-12 제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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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천 감독 '선 굵은 야구' 뒷심
문병권, 5연속 완투승 만점 활약
젊고 힘있는 선수들 주축 상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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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6월 3일, 태평양과의 일요일 홈경기에서 5-0으로 완패한 LG 선수단은 한동안 경기장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채 라커룸에 숨어 있어야 했다.

100여 명의 분노한 팬들이 잠실구장의 본부석 출입문으로 몰려들어 백인천 감독에 대한 청문회를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90년은 한국 프로야구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대혼전이 벌어진 해였다.

개막 후 두 달이 넘은 6월 초까지도 1위 빙그레부터 5위 삼성까지 1경기 차로 뒤섞여 있었고, 매 경기가 예비 한국시리즈라 불릴 만한 혈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5년 연속우승에 도전하는 해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해태에 세 번째 도전장을 던진 창단 5년 차 신흥강호 빙그레가 칼을 갈고 있었다.

거기에 전통의 강호 삼성과 지난 시즌 김성근 감독의 지휘 아래 첫 플레이오프 진출의 기적을 연출했던 돌풍의 팀 태평양이 상위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전년도 꼴찌 팀 롯데도 거물신인 박동희와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한 김응국을 앞세워 봄 한때나마 선두경쟁에 비집고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유독 LG만 홀로 6경기 차로 멀찍이 떨어진 채 갈지자 걸음을 계속하는 태평세월이었다. 그리고 지난 3년 동안 5위, 6위, 6위로 뒷걸음질 친 끝에 끝내 꼴찌까지 밀려나자 팬들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8년 만에 복귀해 MBC에 이어 LG에서도 초대 감독이 된 백인천은 그런 난감한 상황에서도 여유가 넘쳤다. 특유의 '힘의 야구'를 구사하며 한 점에 연연하지 않았고, 감독석에서 연신 파안대소하는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속 모를 여유가 서울 팬들의 가슴을 긁어놓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날의 청문회 소동이 약이 되었던지, 그 다음 경기일인 6월 5일 트윈스는 광주에서 김영직의 연속경기 홈런에 힘입어 해태와의 더블헤더 두 경기를 독식하며 탈꼴찌에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마치 문득 정신을 차린 맹수처럼 그대로 자리를 차고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고, 6월 13일까지 무려 8연승을 질주해 단숨에 5위로 올라서며 중위권 싸움으로 전장을 옮겨놓았다.

분위기의 반전을 이끈 것은 경북고 시절 4관왕 투수로 유명세를 떨쳤지만 프로무대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던 문병권이었다.

그는 팀이 꼴찌로 처져있던 5월부터 5연속 완투승을 거두며 연패탈출과 연승연결의 주역 노릇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흐름을 타기 시작하자 김태원과 김용수, 그리고 마무리 정삼흠으로 이어지는 주축투수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하며 서너 번 이기고 한 번 쉬어가는 흐름을 시작했다.

강점과 약점이 뚜렷이 갈리고, 그에 따라 팬들의 호와 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 지도자 백인천이다. 하지만 감독 중심의, 선 굵은 야구를 추구하는 그의 스타일이 대개 젊고 힘 있는 선수들로 이루어진 팀과 궁합이 맞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해 LG는 만년유망주 김태원과 문병권이 18승과 10승으로 올라섰고, 김동수, 노찬엽, 윤덕규, 이병훈 등 젊은 타자들이 새로운 중심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주축 선수들의 컨디션에 연연하지 않는 감독의 배짱은 신인급 선수들에게 확실한 기회가 됐고 한 점과 1승에 안달복달하지 않는 감독의 여유는 선수들이 조금 더 멀리 내다보며 달릴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시즌 개막 직전 김기범이 부상으로 이탈하고, 김건우의 재활이 생각보다 늦어지면서 뚫린 선발진의 공백을 막기 위해 김용수와 정삼흠의 보직을 맞바꾼 도박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선수인생 내내 팀 마운드의 가장 믿을 만한 버팀목이었던 김용수는 역시나 선발투수로서도 12승을 올리며 제 몫을 했고, 선발로서는 기복이 있던 정삼흠이 마무리로서 짧게 던지면서 오히려 안정을 찾고 23세이브를 올렸다.

게다가 후반기에 들어서자 후배들의 분발에 자극받은 김상훈, 이광은, 김재박, 신언호 마저 차례로 제 몫을 해내기 시작하며 불붙은 상승세에 기름을 끼얹어댔다.

/김은식 야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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