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61]삼성-13 반도체신화의 그늘(上)-삼성자동차 실패

삼성의 자동차 야심, IMF 앞에 꺾이다

이한구 기자

발행일 2018-06-12 제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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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자동차
/삼성 50년사 수록

상용차에 승용차까지 진출 불구
눈덩이 적자 대우와 빅딜도 불발
르노에 매각 했지만 '헐값'논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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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영시대의 두드러진 다각화는 삼성이 새롭게 자동차사업에 진출한 것인데 배경은 다음과 같다.

삼성중공업은 1983년 한국중공업으로부터 중장비사업을 인수한 후 지속적인 기술개발과 투자로 중장비부문에서 국내 제일의 메이커로 발돋움했다.

경제규모 확대에 따라 사회간접자본이 확충되고 물동량이 급증함에 따라 상용차 수요급증이 전망되면서 삼성중공업은 상용차 생산에 착수했다.

상용차란 영업목적의 7인승 이상의 승합자동차와 화물자동차를 지칭하는데 당시 삼성이 생산하기로 한 차종은 기존의 중장비사업과 생산체제 및 부품업의 특성이 유사한 덤프트럭, 믹서트럭, 카고트럭, 콘크리트 펌프카 등이었다.

1988년 4월 정부는 자동차 수입자유화를 단행한 뒤 1989년 8월에는 자동차산업 합리화 조치를 해제하고 외국인투자를 허용했다.

삼성중공업은 일본 닛산 디젤과 대형트럭 제작 및 판매를 위한 트럭 새시에 대한 기술제휴계약을 체결해 1992년 7월 4일 정부로부터 사업승인을 받았다.

삼성은 창원2공장에 상용차 조립 라인을 구축하고 1995년 5월 24일부터 15t 트럭, 6믹서 트럭 등 2종의 대형트럭 판매를 개시했다.

삼성은 승용차 생산사업에도 진출했다. 삼성이 완성차사업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였다. 1978년초 신규사업으로 도요타, 폭스바겐 등과 합작 내지 국내 업체인 신진자동차의 인수를 검토했으나 국내외 여건 미성숙으로 보류했던 것이다.

1980년대 미국 크라이슬러 등과 접촉하는 등 탐색을 계속했는데 1989년 7월 정부의 자동차 합리화 업종 지정해제에 따라 재차 자동차사업을 추진해 1994년 4월 세계최고수준의 기술력을 갖춘 닛산과 승용차에 대해서도 기술제휴계약을 하고 정부에 사업승인을 신청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기존업체들의 강한 반발에 직면했다. 삼성이 완성차시장에 진출할 경우 과당경쟁이 불가피해 국내 완성차산업이 붕괴될 수도 있다며 배수진을 쳤던 것이다.

하지만 삼성차 생산기지의 부산유치를 갈망했던 부산시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입어 1994년 12월 7일 정부가 삼성이 제출한 승용차 및 소형트럭 기술도입 신고서를 수리했다.

1995년 3월 28일 삼성전기(49%), 삼성전관(40%), 에버랜드(당시 중앙개발 10%) 등의 공동출자로 자본금 1천억원의 삼성자동차가 설립됐다.

생산기지로는 부산 강서구의 바다를 메워 조성 중인 신호공단 내의 55만평을 확정, 1996년 10월 공장건설을 완료하고 시제품을 생산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사태로 유동성 위기를 겪어 삼성생명 주식을 투입해 회생을 시도했으나 삼성생명의 주식 상장이 늦어져 자금투입이 불발됐다.

1998년부터 중급의 세단승용차 'SM5'를 시장에 내놓으며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했다. 그해 2~11월까지 월 4천대 판매를 기록했으나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적자로 회생이 불투명해지자 정부가 같은 해 12월 7일 '삼성 자동차부문과 대우 전자부문간 교환'을 발표했으나 삼성상용차가 걸림돌이었다.

빅딜 발표 후 삼성의 자동차 판매대수는 월 200~400대로 주저앉았다.

삼성은 자동차사업(삼성자동차, 삼성상용차, 삼성전기 자동차부품사업)을 모두 정리할 심산이었으나 대우는 삼성상용차의 인수를 거부한 것이다.

삼성상용차의 연간 생산능력이 1t 트럭 2만5천대와 대형트럭 6천대 규모에 불과한 데 비해 부채가 8천억원을 능가해 인수해도 실익이 없다는 것이다.

1999년 1월 22일 김대중 대통령이 이건희 회장, 김우중 대우회장과 연쇄 회동하면서 빅딜의 조기타결을 요구하자 그해 2월 3일 그룹간 '선인수-후정산'에 합의했다.

정부의 초강수에도 별 진전이 없자 1999년 5월 21일 정부와 삼성자동차 채권단은 이건희 회장에게 "이 회장의 잘못된 투자 결정 탓에 손실이 발생했으니 책임분담 차원에서 응분의 사재출연"을 요구했다.

정부와 채권단은 삼성자동차의 총부채 4조3천억원에 사업 계속 시 발생할 손실을 현재 가치로 환산해 더하고 생산설비 등의 자산가치를 빼면 삼성이 메워야할 부채규모를 56조원에 이를 예정인데 이중 4천억원을 이 회장이 부담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삼성은 "이 회장이 삼성차 경영권까지 포기한 마당에 개인재산 출연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며 "빅딜 이후 도의적 차원에서 회장 사재 추가출연 여부는 검토할 수도…"라며 빅딜과 무관하게 협력업체 지원차원에서 이 회장 사재 3천억원 출연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흘렸다.

재계는 삼성의 편을 들었다. 정부 주도의 빅딜을 개인재산 출연과 연계시키는 것은 자본주의의 '사적 재산 자유원칙'과 '주식회사의 유한책임원칙'을 무너뜨리는 처사라며 반발한 것이다.

1999년 6월 30일 삼성그룹은 부산지방법원에 삼성자동차의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삼성자동차의 빅딜은 무산됐다. 삼성차의 총부채 규모는 은행권 1조1천690억원, 2금융권 3조3천230억원 등 총 4조4천920억원인데 삼성은 이 회장의 사재 2조8천억원(삼성생명 지분 21.4%)을 출연한다고 발표했다.

1998년 12월 7일에 합의했던 '삼성차- 대우전자 빅딜'은 7개월 만에 백지화됐다. 1995년 3월 삼성자동차 설립 4년3개월 만이자 'SM5' 첫차 생산 1년4개월 만에 법정관리를 신청한 것이다.

1999년 12월 30일 채권단은 프랑스의 르노자동차를 우선협상대상자로 지정하고 여러 차례의 협상을 통해 2000년 4월 연산 24만대의 삼성자동차 지분 80.1%를 5억6천700만달러에 매각했다.

상호는 르노삼성자동차(주)로 변경됐다. 국민경제측면에서 큰 암초를 제거했지만 당시 실사 가격 12억달러의 절반에도 못미쳐 헐값 매각이란 평가를 받았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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