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그녀들의 이유있는 과격함

배재흥

발행일 2018-06-20 제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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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흥 사회부 기자
1912년 3월의 어느 날. 영국 런던의 피카딜리 거리는 참정권을 주장하는 수백여 명 여성 운동가들의 과격한 시위 탓에 온통 아수라장이 됐다. '에멀린 팽크허스트'를 필두로 한 이들은 눈에 보이는 건물 유리창을 모조리 깨뜨렸고, 우체국의 편지들을 불태우는 등 방화도 서슴지 않았다.

과격함의 이유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서프러제트' 속 대사 한 줄로 요약된다. "전쟁(폭력)이 남자들이 들어주는 유일한 말이니까요"

2018년 5월 19일. 서울 혜화역 일대는 홍익대 누드 크로키 수업 몰카 범죄 관련 성차별 수사를 규탄하는 1만여 명 여성들의 분노로 가득 찼다. 지난 9일에도 2만여 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100여 년 전 영국의 여성들이 그랬듯 유리창에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르진 않았지만 남성을 대상으로 한 혐오와 조롱 섞인 과격한 언어를 내뱉으며 외쳤다. "우리의 일상은 포르노가 아니다."

현재까지 여성들의 과격함은 이들이 주장하는 한국사회의 기득권인 남성들의 관심을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남성들은 사건의 본질을 보려 하기 보다, 이들의 과격한 언어와 몸짓 하나하나에 현미경을 겨누는 적대적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말이다.

이렇다 보니 여성들이 가진 분노의 본질은 차츰 잊히고, 그 자리에는 여성과 남성의 갈등이 자리 잡는 모양새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는 분명한 사실은 모든 성범죄의 대다수 피해자는 여성이라는 것. 여성들의 이번 집단행동을 촉발한 몰카범죄 피해자 중 84%도 여성인 현실이다.

다음 달 7일 여성들은 3차 집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한다. 벌써부터 이들이 뱉을 과격한 언어에 가슴 한편에선 불편한 감정이 피어오른다. 하지만 이들이 과격해질 수밖에 없었던, 과격함에 가린 사건의 본질에 주목하려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 또한 여전히 20대 중반 여동생의 늦은 귀가가 걱정되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배재흥 사회부 기자 jhb@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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