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에서 찾는 고려 1100년의 흔적·9]남과 북에 함께있는 문화유산

갈라진 후손들 다시 잇는 '왕의 안식처'

이희인 기자

발행일 2018-07-24 제17면
글자크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링크
  • 메일보내기
  • 인쇄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메일전송
강화 곤릉 석실(이희인)
강화 곤릉 석실. /이희인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장 제공

계단식으로 조성된 능역, 호석·돌짐승 배치
개성 주변부 60여기 자리… 세계유산 등재도
여몽전쟁시기 강화에 만든 4기 '교류 매개체'


2018072301001602100077113
전근대 국가에서 왕은 특별한 존재였다.

그래서 왕의 안식처는 보통 사람의 무덤과 구별해 능(陵)이라 부른다. 최고 권력자의 무덤인 만큼 왕릉은 도읍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다.

500여 년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주변에는 태조 왕건릉을 비롯해 60여기의 고려 왕릉이 있다.

고려 왕릉은 통일신라시대의 왕릉 제도를 계승 발전한 것이다. 능역에 석인상과 돌짐승을 배치하고 12지신을 새긴 호석을 봉분 주위에 설치하는 방식은 중국 영향을 받아 통일신라시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내부 구조는 고려만의 독특한 모양을 갖추고 있어 계승과 창조가 함께한다. 개성 일대 왕릉 가운데 태조 현릉과 공민왕 현릉, 충목왕 명릉, 7릉떼 왕릉 군이 2013년 '개성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유적에 포함되었다.

고려 왕릉은 대개 좌우로 산줄기가 감싸고 그 사이에 천이 흘러가는 산 중턱에 터를 잡았다. 능역은 산지의 경사를 따라 3~4단의 계단식으로 조성되었다.

계단식 구조는 산지의 지형 훼손을 최소화 하면서도 능의 위엄을 높일 수 있는 고려인의 지혜였다. 능역의 가장 위에는 석실을 조성하고 그 위에 쌓은 봉분 주위에는 호석을 두르고 돌짐승을 배치하였다.

아랫단에는 석인상과 장명등을 설치하고 제례를 지내기 위한 전각도 배치했다. 고려시대에는 왕릉에 현릉, 장릉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공민왕릉에서 완성된 고려의 능제(陵制)는 이후 조선 왕릉의 원형이 되었다.

왕건릉(정학수)
왕건릉. /정학수씨 제공

고려 왕릉은 도굴의 피해를 입은 경우가 많아 온전한 부장품의 양상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傳)인종 장릉 출토 청자 참외모양 병(국보 94호)과 청자 합, 잔, 청동 도장, 은제 수저, 시책(諡冊) 등을 통해 당시 왕릉의 위상을 짐작 할 수 있다.

고려 왕릉은 개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쪽 강화에도 있다. 강화는 임시 피난처가 아니라 여몽전쟁기간 동안 개경을 공식적으로 대체한 도읍이었기 때문이다.

고려 사람들은 강화를 강도(江都)라 했고 황제의 도읍으로 인식했다. 1232년 천도 당시 강화로 옮겨졌던 태조 왕건의 관은 개경으로 돌아갔지만 강도시기에 세상을 떠난 왕과 왕비의 능은 남았다.

국왕이었던 고종의 홍릉을 비롯해 희종의 석릉, 고종의 어머니 원덕태후의 곤릉, 고종의 며느리 순경태후 가릉 등 4기의 왕릉이 그것이다.

이 밖에 인산리석실분과 능내리석실분, 연리 석실분 등 아직 주인을 알 수 없지만 왕릉이 분명해 보이는 석실분도 있다.

경기문화재연구원
강화에도 고려 왕릉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어찌 알고 이곳을 찾은 사람들 가운데 생각보다 작고 초라한 모습에 실망하는 이도 종종 있다. 그러나 아쉬워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강화의 고려 왕릉은 단순한 문화재가 아니라 오늘날 분단의 현실에서 개성의 왕릉과 함께 남과 북이 공유하면서 서로를 잇는 매개가 될 수 있는 살아있는 유산이기 때문이다.

/이희인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장

이희인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