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3]연습생 출신 홈런왕 신화(上)

장종훈(당시 빙그레)이 쏘아올린 '40홈런 시대'

경인일보

발행일 2018-07-24 제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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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시즌 1위' 확정지은 빙그레
천적 해태와의 치열했던 17차전
장, 0-0 박빙서 130m짜리 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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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9월 17일, 빙그레(현 한화)가 해태(현 KIA)를 대전으로 불러들여 시즌 17차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미 열흘 전에 2위 그룹과 10경기 이상의 격차를 벌리며 일찌감치 정규시즌 1위를 확정지은 빙그레였지만, 해태와의 승부만큼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1988년과 1989년에 이어 1991년까지 세 차례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서 만나 우승 문턱에서 좌절하게 만들었던 아픈 기억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그 해 역시 한국시리즈에서 만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이 2위를 달리던 해태였고, 또 역대 최강이라던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완성하고도 빙그레는 유독 해태에게만은 시즌 4승 12패로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해법을 찾지 못한다면 그 해 역시 정성껏 쑨 죽으로 호랑이 밥을 챙기는 꼴을 벗어나기 어려울 듯 했다.

게다가 양 팀의 기둥투수 송진우와 이강철이 나란히 18승으로 다승 공동 선두에 올라 있었던 것도 은근히 신경을 쓰게 만들고 있었다.

정규시즌의 남은 경기는 17일과 18일 두 경기 뿐이었고, 그 안에 뭔가 결판이 나야 했다. 그 밖에 해태의 이순철도 롯데의 박정태를 누르고 최다안타 타이틀을 챙기기 위한 안타 한 개가 필요했다.

물론 어느 만큼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지만, 빙그레의 김영덕 감독은 6-0으로 결정적인 승기를 잡은 5회 초에 선발투수 한희민을 내리고 송진우를 등판시켜 프로야구 최초의 '다승(19승)-구원(25 세이브포인트)' 2관왕을 배출했다.

그러자 이강철의 동료 문희수가 5회에 자진등판해 이정훈과 장종훈의 몸통에 화풀이를 하고 퇴장당하는 소동을 빚었고, 그렇게 격앙된 틈에서 다시 해태의 이순철은 7회 기습번트를 성공시키며 최다안타 타이틀을 확정짓는 150개째 안타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뜨겁게 달아올랐던 열기가 모두 세월 속으로 날아가버린 지금에도 야구팬들의 기억 속에 새겨져 남은 또 다른 대목이 있었다.

0-0으로 팽팽히 맞선 4회 말, 무사 1,2루에 주자를 놓고 타석에 선 빙그레의 4번 타자 장종훈이 원 스트라이크 투 볼에서 해태 선발 신동수의 4구째를 때려 펜스 가운데의 가장 깊숙한 곳을 넘기는 130m 짜리 홈런을 날렸던 순간이다.

바로 그 순간, 한국프로야구는 사상 처음으로 한 시즌에 40개의 홈런을 날리는 타자를 만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홈런은 야구가 품고 있는 가장 반 야구적인 현상인지도 모른다. 야구는 촘촘하게 짜인 팀플레이와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작전과 협력플레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3할 타자와 2할5푼 타자 사이에 존재하는 단 5% 차의 확률에 근거해 주전과 후보를 나누고 타순을 짜고 작전을 선택하며, 스타와 후보 선수를 구분하게 된다. 하지만 홈런은 그 모든 과정들을 순식간에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사건이다.

그래서 경기 종반 결정적인 한 점 싸움의 순간에 터져 나오는 홈런 한 방은 그 앞의 타자가 아웃카운트 하나와 바꾸며 성공시킨 희생번트, 혹은 주자가 횡사의 위험을 무릅쓰고 시도해 유니폼에 온통 흙물을 들여가며 성공시킨 과감한 도루의 모든 숨 가쁜 순간들을 허무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경기 막판에 터져 나온 만루 홈런 한 방은 기선을 잡는 선취점이니, 안전궤도에 올리는 추가점이니, 사실상 승부를 가른 쐐기점이니 하며 세 시간 넘도록 해설가가 열을 올리던 모든 순간들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물론 홈런을 치겠다는 일념으로 배트를 휘두르는 타자도 있을 수 없고, 폭죽 같은 홈런포에 의지해 경기를 승리로 이끌겠다는 감독도 있을 수 없다.

야구감독은 경기장의 선수들을 향해 수많은 사인을 날리지만 '홈런을 치라'는 사인은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바로 그런 역설적인 매력 때문에 홈런은 야구장으로 팬들을 끌어 모으게 된다.

'왜 내야수와 외야수 사이의 적당한 곳에만 떨구면 안타가 되는 것을, 굳이 외야수가 지키고 선 곳까지 멀리 때려내느라 헛수고들이냐'고 질타했다는 초창기 어느 야구단 사장의 생각처럼, 복잡한 생각을 할 필요 없이 '멀리 강하게 때릴수록 대단한 것'이라는 단순함.

그리고 어떤 궁지에서도 '번쩍' 한 순간에 뒤집어내고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호쾌함.

그래서 야구를 미국인들의 삶으로 만든 것은 베이브루스(미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프로야구 선수로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홈런 타자)였고, 일본인들의 자존심으로 만든 것은 오 사다하루'(일본에서 태어난 중화민국 국적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감독)였다.

/김은식 야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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