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4]연습생 출신 홈런왕 신화(下)

구름 관중 몰고다닌 장종훈(당시 빙그레) 홈런쇼

경인일보

발행일 2018-07-31 제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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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41개 3경기당 1개 담 넘겨
타격 순간 양팀 응원석 탄성 교차
데뷔 5년만에 '완벽한 타자' 등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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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 역시 홈런의 열매를 따먹으며 태어났고 자라왔다.

프로원년, 역사적인 개막전 연장 10회 말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홈런과 그 해의 패권을 가른 한국시리즈 6차전 9회 초 김유동의 만루홈런은 당대 자타공인 최고의 선수들이 국가대표로 묶여있던 공백에도 불구하고 프로야구가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이만수와 김봉연의 영호남 홈런대결은 1980년대 내내 야구장을 끓어오르게 만든 최고의 연료였다.

하지만 1982년 80경기에서 22개의 홈런을 기록한 김봉연으로부터 1988년에 108경기에서 30홈런을 때려낸 김성한에 이르기까지, 날고 긴다던 홈런왕들이 기록한 홈런은 경기당 0.27개를 넘지 못했다.

1986년의 김봉연은 경기당 0.2개에도 미치지 못하는 108경기 21개의 홈런으로 홈런왕에 오르기도 했었다.

말하자면 4, 5경기쯤 연달아 관전해야만 그 선수가 홈런을 날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셈이었던 것인데, 경기당 0.4개의 홈런을 기록했던 베이브 루스가 '베이브 루스가 홈런 치는 걸 보기 위해 야구장에 가는' 풍경을 만들었던 것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것이었다.

장종훈이 1992년에 기록한 홈런 41개는 시즌 경기당 0.325개에 해당했고 대략 세 번 경기장을 찾으면 한 번 정도는 '장종훈의 홈런'을 구경할 수 있는 빈도였다.

90년대 초반 서울과 부산의 '빅 마켓 팀'들의 강세와 더불어 장종훈의 홈런쇼는 관중을 야구장으로 불러모으는 가장 확실한 이벤트였다. 그렇게 한국프로야구는 300만 시대를 넘어 400만 시대의 코앞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그 해 그가 홈런을 때리는 순간 상대팀 응원석에서마저 탄성이 흘러나오는가 하면 그저 평범한 안타로 끝나는 순간에는 이글스 팬들마저 야유를 터뜨리는 기이한 현상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입장료를 '안타가 아닌 홈런을 보는 값'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92년 시즌 마지막 두 경기를 남겨둔 채 39홈런을 기록하고 있던 장종훈은 17일에 40홈런을 날리며 송진우의 19승째를 만들어냈고, 18일에는 이강철의 19승 도전을 좌절시키는 41호 결승 홈런을 날리며 다시 송진우에게 단독 다승왕 타이틀을 선물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한국의 베이브 루스'라는 칭호와 함께 2년 연속 MVP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장종훈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86년, 불러주는 곳이 없어 신생팀 빙그레의 월급 40만 원짜리 연습생으로 입단한 뒤 이듬해 팀의 주전 유격수 이광길이 부상으로 이탈한 틈에 1군 무대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는 프로 유니폼을 입은 뒤 8㎝나 자란 키만큼 기량도 쑥쑥 성장해 불과 4년 만에 홈런왕 타이틀을 접수했고, 1991년에는 한국프로야구 35홈런과 114타점으로 두 부문 신기록을 세웠다.

여기에 더해 0.345의 타율과 21개의 도루까지 성공시키며 '역사상 가장 완벽한 타자'로 평가받게 된다. 그리고 1992년, 시즌 종료를 코앞에 두고 기어이 40홈런 벽을 넘어서며 후배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질 수 있었다.

그가 세운 41홈런의 벽은 98년에 42개를 기록한 우즈에 의해 무너졌고, 99년에 50개의 벽을 넘은데 이어 2003년에 56개까지 달려간 이승엽의 기록 뒤편으로 넘겨지게 되었다.

마지막 두 경기에서 터져 나온 장종훈의 홈런 두 방은 방그레 팬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기에 충분했다. 압도적인 격차로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지은 데 이어 '눈엣가시' 해태의 기를 꺾는 기분 좋은 결정타들이었기 때문이다.

/김은식 야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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