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선언 특별기획-남북의 마디 인천, 새로운 평화와 번영을 말하다·(13)]강화·개성 유대감 증명 '개성부원록'

병인양요때 강화 위해 목숨 건 개성 '고려의 형제'
150년전 기록 강화서 번역돼 '의미'
'수도' 역사적 동질감 지원부대 활약
"이야기 발굴·후손들 만남 이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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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고종 3년)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 개성 사람들이 군대를 모집해 강화를 돕기 위해 일어섰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천주교 박해를 빌미로 1866년 9월 6일(이하 음력) 강화 갑곶에 기습 상륙했고, 이틀 뒤 강화읍을 함락했다. 강화 유수는 섬 서쪽으로 도망을 갔다.

조선은 임시 군영을 조직해 대응하면서 강화와 인접한 개성에 지원부대를 편성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9월 11일 편성된 개성 지원부대는 김포 일대에 머물다 10월 4일 정족산성 전투로 프랑스군의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강화에 진입했다. 이후 10월 14일까지 강화에 머물면서 퇴각한 프랑스군의 재침입을 막고, 전란 피해 복구를 지원했다.

이들의 활약상은 2015년 강화고려역사재단이 번역해 발간한 '개성부원록(開城赴援錄)'을 통해 알려지게 됐다. 정확한 편찬연도와 저자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개성부원록'은 병인양요 다음 해 개성에서 개성 토박이들에 의해 공동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화와 개성은 고려의 수도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동질감을 갖고있는 지역이다.

강화가 외세의 침입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개성사람들이 강화도를 돕기 위해서 나선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이 책은 강화와 개성 사이 특수한 유대관계의 증명이기도 하다.

남북 분단은 이런 고려의 두 형제를 갈라놓았지만, 개성 사람이 주인공인 150년 전 기록이 강화에서 번역됐다는 것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강화고려역사재단은 간행사에서 "(책의 간행은) 150년 전 서양인에 의해 점령당했던 강화부(江華府)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왔던 그분들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한다"며 "강화·개성의 주민들이 오랫동안 기억할 만한 훈훈한 미담이 될 수 있을 것이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안타까운 시대에 앞으로 그분들의 행적과 다음 이야기를 발굴하고, 후손들이 만남의 자리를 갖는 것은 지역사에서, 우리 분단의 역사에서도 의미가 있는 일화가 될 것"이라고 제언하기도 했다.

이 책이 번역된 2015년만 해도 남북 평화의 시대가 이렇게 성큼 다가올 것이라는 기대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4·27 판문점 선언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급진전되면서 고려문화역사재단이 간행사에서 밝힌 바람이 현실화할 날이 머지않았다.

'개성부원록' 번역에 참여한 김인호 광운대 교수는 "강화와 개성은 1일 생활권으로 고려 이후로도 교류가 잦았고, 두 지역 사이 밀접한 유대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개성 주민들이 빨리 강화를 구원하러 가겠다는 유대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지금은 분단이 됐지만 이런 유대의식을 계속 이어 나가자는 취지로 간행사를 썼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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