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선언 특별기획-남북의 마디 인천, 새로운 평화와 번영을 말하다·(15)]고려 유배지 인천 섬 재조명

섬마을에 새겨진 고려왕조 '유배의 역사'

김민재 기자

발행일 2018-08-20 제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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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석릉에 묻힌 21대 왕 희종 등
수많은 귀족·왕족 강화·교동 귀양
"국란 일어나도 방비할만해 이용"
백령·대청은 원나라 유배지로 유명
공동학술연구 등 흔적찾는 일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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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와 교동 등 인천의 섬은 옛 고려왕조의 유배지로서 아직도 그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북쪽의 개성이 고려왕조의 도읍지로서 화려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면 강화와 교동 등지는 그 화려함의 이면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4·27 판문점 선언을 계기로 남북 역사학술 교류가 본격화되면서 인천 섬지역에 새겨진 고려 왕조 유배 역사에 대한 재조명도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인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석릉에 묻힌 고려 21대 왕 희종(1181~1237). 1204년 즉위한 그는 국정 전반을 좌우하던 무신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폐위돼 교동으로 쫓겨나게 된다.

이후 용유도, 개성, 교동을 오가다 1237년 용유도에서 병사해 강화 양도면 진강산 동쪽의 석릉에 묻혔다.

1995년 편찬된 교동향토지는 희종의 귀양 이야기를 다루면서 "당시 개성의 관문 역할을 했던 교동은 국란이 일어나더라도 방비할만한 체제가 잘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왕족들을 안심하고 귀양 보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희종 외에도 수많은 귀족들과 왕족이 강화·교동으로 귀양을 왔다.

고려 혜종~정종 대에 걸쳐 반란을 꾀했던 왕실 외척 왕규도 강화 갑곶리로 유배됐다가 죽임을 당했다. 왕규는 945년 혜종을 죽이고 외조카를 왕에 앉히려다 실패했다. 왕규는 쫓겨난 갑곶리에서 일당 300여 명과 함께 몰살됐다.

몽골제국(원나라)이 고려를 점령했던 시기에도 인천 섬은 고려 왕족의 귀양지로 이용됐다. 고려 30대 왕인 충정왕(1338~1352)은 12세의 나이에 왕에 봉해졌다가 외척의 간섭과 왜구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폐위됐고, 원 순제에 의해 강화로 유배돼 독살됐다.

이밖에 원종의 셋째 아들 순안공은 충렬왕 3년(1277) 반란을 모의했다는 모함을 받고 강화 매음도(지금의 강화군 삼산면)로 귀양을 갔다.

우왕(1365~1389)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로 추방됐고, 우왕의 아들 창왕(1380~1389)도 왕씨(氏)가 아닌 신돈의 후손이라는 명목으로 폐위돼 불과 9세 때 강화에서 죽음을 맞았다.

특히, 서해 최북단 섬 백령도와 대청도는 원나라 황실의 유배지이기도 했다.

이중환의 '택리지' 팔도총론 황해도 편에는 "장연 남쪽 바다 복판에 대청·소청 두 섬이 있는데 둘레가 꽤 넓다. 원나라 문종이 순제(원 마지막 황제)를 대청도로 귀양 보낸 일이 있었다. 순제는 집을 짓고 살면서 순금 부처 하나를 봉안하고 매일 해 돋을 때마다 고국에 돌아가게 되기를 기도했는데, 얼마 후 돌아가서 등극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1280년 원 황제 세조가 아들 아야치(愛牙赤)를 대청도로 유배 보냈다는 기록도 '고려사절요'에 나온다. 삼별초 토벌의 공신 김방경도 충렬왕 4년(1278) 대신들의 모함으로 원 세조에 의해 대청도로 유배됐다.

이렇듯 인천 섬에 깃든 고려 왕조 유배 역사는 강화가 고려의 임시 수도였던 '강도 시대'와 더불어 중요한 남북 역사교류의 매개가 되기에 충분하다. 공동학술 연구, 기념사업과 더불어 흔적조차 사라진 유배지를 찾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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