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스티븐스 저격사건이 조선인 단결로

한정규

발행일 2018-08-31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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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전명운·장인환의 '거사'
해외거주·내국인 단결토록 했으며
독립운동에 크게 공헌했다
그 시절 분노하고 행동했던
'역사의 주인공들'을 생각해본다


한정규 문학평론가
한정규 문학평론가
미국인 스티븐스는 1904년 12월 27일 미국 주재 일본외무성 고문으로 임명된 뒤 일본이 강제로 조선과 맺은 식민지조약을 미화하고 찬양했다. 그가 하는 행동에 미국 내 한인들이 크게 분노했다.

스티븐스는 을사조약 관련 기자회견을 하면서 "을사조약은 미개한 조선인들을 위해 이루어진 조치로 조선인은 독립할 자격이 없는 무지한 민족"이라 망발을 서슴지 않았다. 그때 기자회견을 지켜보던 한국교민대표 4인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를 구타했다.

그 후 하와이 노동이민자 전명운과 장인환은 스티븐스가 1908년 3월 23일 미국 워싱턴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차역에서 사살 계획을 세웠다. 전명운이 쏜 총알은 빗나가고 장인환이 쏜 총탄을 맞아 죽었다.

스티븐스를 저격한 전명운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가 됐으며 장인환은 25년형을 받았다. 스티븐스를 저격한 그들을 돕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가 통합하고 7천 달러 모금운동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스티븐스 저격사건'을 계기로 이대위, 박용만, 김홍균이 이끄는 북미지방총회와 윤병구, 박상하, 정원명이 속한 하와이 지방총회가 1910년 대동보국회와 통합하고 강영소, 홍언, 안창호가 속한 만주지방총회를 포함 대한인국민회로 합해 해외조선인의 최고기관으로서 헌장을 제정하고 회보 겸 신문을 발간 최초 국민국가수립을 천명, 실질적 임시정부 역할을 했다.

1910년 대한인국민회는 북미, 하와이, 멕시코, 쿠바, 시베리아령 만주지역 등 여섯 곳의 지방총회와 116개소 지역회가 있었으며 중앙회 위원만도 총 5천여 명이나 됐다. 그런 대한인국민회에는 전문 76조로 된 헌장을 제정해 사실상 망명정부와 같이 해외 한인사회 권익보호를 위해 활동했다. 대한인국민회는 미국정부에 미국 내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에 대해 일본정부 영사가 개입하지 못하도록 협조할 것은 물론 재미 조선인에 관한 일은 대한인국민회를 통하여 처리해 줄 것을 건의하는 등 조선인을 보호하는 일을 했다.

장인환과 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사건'을 계기로 미국에서 독립운동이 그 어느 지역보다 활발했다.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을 계기로 미국을 비롯한 세계도처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그러자 일본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다양해지고 난폭해졌다. 그에 못지않게 조선인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19년 2월 강유구가 서울역 광장에서 새로 부임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일행에게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다. 비록 실패했으나 전 세계에 일본의 흉계를 폭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이외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기해 홍구공원에서 상해전승축하식을 거행한다는 소식을 윤봉길이 듣고 김구와 협의해 중국군 김홍일 장군으로부터 폭탄 2개를 구해 전승축하식장 연단을 향해 투척했다. 일본인 시라카와 육군대장과 상해거류민단장 가와바다가 즉사하는 등 다수가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그 사건으로 상해 임시정부는 중경으로 피란을 했다. 강유구, 윤봉길 사건 외에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총살, 이봉창의 일왕 저격사건 등이 계속됐다. 미국에서 전명운과 장인환이 스티븐스를 저격한 사건은 결과적으로 중국 등 해외거주 조선인은 물론 국내거주 국민들을 단결하도록 했으며 독립운동에 크게 공헌했다.

광복절이 있는 8월의 끝자락에 그 시절 분노하고 행동했던 '역사의 주인공들'을 생각해본다.

/한정규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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