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저기, 안에 있어요?

권순대

발행일 2018-08-27 제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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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방문 두드린것은 월세 독촉하거나
욕정의 대상을 찾을 때였다
그때의 '저기'는 그를 사람이 아닌
사물로 대하는 그저 소리였을 뿐


전문가 권순대2
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지난 8월 14일부터 19일까지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에서 극단 나베의 '예술이 죽었다' 공연이 있었다. '예술이 죽었다'는 한 사람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나이는 28세. 직업은 소설가. 등단한 적은 없으나 신춘문예 심사평에 언급되었고 소설을 쓰고 있으니 소설가라 해도 되지 않을까. 비록 자신이 쓰고 싶은 소설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잡지사가 요구하는 대로 써야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벌이가 신통치 않아 월세는 밀렸고, 냉장고는 비어 있다. 지병이 악화되어 상태가 심각하나 치료는 엄두를 낼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쓴다. 쓰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는 것처럼.

연극은 그의 죽음으로 끝난다. 아니 주검이 발견되지 않은 채 끝난다. 사회에서 밀려나고 밀려나 홀로 고립된 죽음 뒤에 그의 몫으로 남겨진 것은 밀린 고지서 다발이다. 학자금 대출에서부터 신용카드까지 각종 고지서 다발만이 그가 죽음에 이르는 동안 벌인 사투의 시간을 말해주고 있다. 밀린 고지서의 두께는 그가 고립된 채 버틸 수 있었던 시간의 두께이다. 그 두께가 두꺼워지는 동안 그의 고립은 깊어 갔다. 짐작했겠지만, 이 연극은 연극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이야기이다.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라는 마지막 문장을 남긴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을 이제는 망각하지 않았는지 연극은 묻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5 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예술 활동 수입의 중앙값은 300만원이며 평균값은 1천255만원이다. 조사 대상에 포함된 분야는 평균값이 높은 순으로 건축, 방송, 만화, 영화, 음악, 연극, 대중음악, 공예, 국악무용, 사진, 미술, 그리고 문학이다. 문학 분야의 중앙값은 10만원이며 평균값은 214만원이다. 연극분야의 중앙값은 500만원이며 평균값은 1천285만원이다. 연극분야의 경우 '연극인, 우리 스스로의 복지' 실태조사(2017년)에서 1천319만원으로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다만 수입에서 연극공연 수입은 351만원이며, 연극공연 외 활동이 385만원, 연극외 예술 활동이 241만원, 예술과 무관한 활동이 393만원으로 조사되었다. 예술인 복지법이 시행되고 있는 지금의 통계들이다.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이 문장은 물음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던지는 문장이다. 단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부터 오는 불안 정도만 담고 있다면 미지의 가능성을 창조할 힘이 그 속에 있으니 스스로의 재능을 갈고닦으라고 말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생존의 위기 앞에서 '언제까지 꿈꿀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로 그만 탈바꿈하고 만다. 물론 이른바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만 해당한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말이 자성의 문장이 아니라 탄식과 자조의 문장으로 전락하게 되는 배경에는 창작자의 능력과 무관한 사회적 요인이 자리하고 있다. 자기 좋아서 하는 일이며, 그래서 모든 책임이 스스로에게 있다고 말하는 사회는 얼마나 참혹한가. 적어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말이 그런 답으로 돌아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연극 '예술이 죽었다'의 그는 이야기를 만들다가 그만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그가 단칸방에 고립된 채 죽어가는 동안 "저기, 안에 있어요?"라며 그의 방문을 두드린 이웃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방문을 두드린 '저기'는 밀린 월세를 독촉하거나 욕정의 대상을 찾을 때였다. 그때의 '저기'는 그를 사람이 아니라 사물로 대하는 그저 소리였을 뿐이다. '저기'가 단지 소리에 그치지 않고 이웃에게 말을 거는 감탄사의 '저기'로 복원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죽는 것이 예술이 아니라 사람이기에. 연극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음식을 들고 찾아온 이웃의 말을 그가 끝내 듣지 못하는 비극을 만들지 않으려면 말이다.

/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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