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선언 특별기획-남북의 마디 인천, 새로운 평화와 번영을 말하다·(16)]북녘땅 거쳐 강화서 발발한 '신미양요'

'제국주의 침략 아픔' 공유한 평양과 인천

김민재 기자

발행일 2018-08-27 제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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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셔먼호 대동강 '무력시위'
조선군 화공작전으로 불 타 침몰
5년뒤 미군의 보복작전 참변초래

수십년간 평양성내 '닻' 전시기록
교류 확대로 학술적 중요성 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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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고종 8) 미국이 조선을 개항시키려는 목적으로 강화도를 침략한 '신미양요'. 전쟁이 벌어진 곳은 강화였지만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북한 대동강과 평양을 만나게 된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교역을 요구하며 대동강으로 진입했다가 평양 군민(軍民)에 의해 격침된 일이 신미양요의 발단이었다.

대동강 물줄기에서 시작해 강화 해협에서 본격화된 신미양요는 남북 역사학술 교류의 주제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다.

1866년 8월 제너럴 셔먼호는 교역 물자를 싣고 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올라가 조선에 통상과 교역을 요구했다.

장마와 만조에 물이 불어난 줄도 모르고 내륙 깊숙이 진입했던 제너럴 셔먼호는 대포를 쏘아대며 무력시위를 벌이다 조선의 화공작전에 당해 불에 탔다.

5년 뒤 미국은 셔먼호 사건을 명분으로 강화를 침입했다. 조선에서는 신미양요로 조선군 53명이 죽고, 24명이 다쳤다고 기록했고, 미국은 조선군이 243명 전사했다고 기록했다.

북한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중대한 '승전'으로 기록하고 있다. 북한은 사건 발생 120주년이 된 1986년 대동강변에 격침비를 세워 기리고 있다.

이는 북한의 반미(反美) 역사 인식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남북이 갈라지기 전에도 평양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 캐나다 출신 의료선교사 '닥터 셔우드 홀' 일가의 조선 기독교 포교 활동상을 기록한 '닥터 홀의 조선회상'은 대동강에서 마지막 운명을 맞은 제너럴 셔먼호의 '닻'이 1890년대까지만 해도 평양성에 전시돼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1891년 조선에 첫발을 디딘 캐나다 의사 윌리엄 제임스 홀은 1년 먼저 조선에 도착한 아내 로제타 홀과 함께 조선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했다.

주로 평양 등지에서 활동했던 제임스 홀은 1894년 5월 아내와 함께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평양으로 가던 중 대동강에 진입하자 제너럴 셔먼호의 닻을 평양에서 직접 본 이야기를 했다.

그는 아내에게 "평양의 대동문에서 셔먼호의 닻과 체인이 걸려 있는 것을 봤고, 조선 사람들은 그 물건들을 서양 배의 운명을 생생하게 상기시켜주는 전리품처럼 전시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제임스 홀이 처음 평양에 간 때가 1892년 3월이니 최소 26년 이상은 평양 시내에 제너럴 셔먼호의 흔적이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닻이 걸린 평양 대동문은 평양성 내성(內城)의 동문으로 높이 19m에 달한다.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통하는 문이라 평양성 성문 가운데서도 중요한 성문이다.

최근 보물로 지정된 인천 송암미술관 소장 '평양성도 병풍'을 통해 당시 대동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병풍이 만들어진 시기도 1890년대로 추정돼 제임스 홀이 평양에 간 때와 딱 들어맞는다.

4·27 판문점 선언을 계기로 남북 역사 교류 확대가 기대되는 요즘 제너럴 셔먼호의 흔적이 평양에 어떻게 남아 있었느냐는 학술적으로 중요한 관심사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해 미처 알지 못한 역사가 북한에 다양하게 존재한다면 신미양요 연구의 폭은 한층 넓어질 수 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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