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있는 에세이]백석과 통영과 난

김윤배

발행일 2018-08-31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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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오지중 오지 '양강도 삼수군'에서
37년간 유배생활로 生 마감한 '백석'
문학은 문학으로 존재할때 '향기'
이데올로기 도구되면 생명 다한것
'관평의 양'이란 산문 그래서 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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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배 시인
여름의 끝 날이다. 폭염과 폭우로 여름이 갔다. 낮 최고 기온이 38도를 오르내릴 때 통영을 찾았다. 아름다운 도시가 폭염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명정샘'이라는 푯말을 따라 우회전했지만 막다른 골목이었다. 샘이 있을만한 곳이 아니었다. 황당해하고 있는데 시민이 다가와 펜스 왼쪽을 가리킨다. 아, 그곳이 명정샘이었다. 도로에서 5m쯤 아래, 사각형의 모습으로 나란히 열려 있는 두 개의 샘이 보였다. 명정샘 건너 편에 충렬사도 보였다. 명정샘과 충렬사 사이에 도로가 나 있지만 도시화 이전에는 '명정골'이라는 한적한 마을이었다.

1930년대, 이곳 명정골에 난(蘭)이라는 아리따운 처녀가 살고 있었다. 그 처녀를 백석은 산문 '편지'에서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 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하였습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백석(1912-1996)이 통영을 처음 찾은 것은 1935년 6월인 듯 하다. 친구 허준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그는 결혼식장에서 동료 기자 신현중에게 소개 받은, 당시 이화여고 학생이던 난(박경련)에게 첫눈에 반한다. 허준의 통영 신행길에 친구들과 동행한 것은 오로지 난을 만날 수 있겠다 하는 열망 때문이었지만 이루지 못했다.

그 이듬해 1월에 다시 통영을 찾지만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 명정샘에 혹 그녀가 나와 물을 깃지 않을까?하는 기대로 종일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았지만 허사였다. 그는 충렬사 돌계단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그녀를 기다리며 쓴 시가 '통영'이다. 같은 제목의 시가 3편 있지만 첫 번째 '통영'은 난을 만나기 전의 작품이다. 두 번째 '통영'이 난을 노래한 시편이다.

'…난(蘭)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는데/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평안도서 오신 듯 한데 동백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로 끝맺는 시 속에 그녀에 대한 사랑과 초조함이 잘 드러나 있다.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계절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라던 불안감은 현실로 이루어진다.

백석은 3월에 다시 통영을 찾았지만 난을 만나지는 못한다. 이때 난의 외사촌오빠인 서병직을 만나 위로를 받으며 통영의 곳곳을 동행했다. 이날을 읊은 시가 '통영-남행시초2'로 서병직에게 헌정된 시다.

'통영장 낫대들었다//갓 한닢 쓰고 건시 한 접 사고 홍공단 댕기 한감 끊고 술 한 병 받어들고//화륜선 만저보려 선창 갔다//오다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 앞에/문둥이 품바타령 듣다가//열이레 달이 올라서/나룻배 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 - 서병직 씨에게'로 된 시에는 난의 이미지는 없다. 난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백석은 1987년 월북작가 해금조치 이후 전집이 출간되어 민족 시인이 되었지만 북한에서의 생활은 고난이었다. 그가 말년을 보낸 양강도 삼수군은 예부터 오지 중의 오지이며 유배지였다. 1959년 당성이 약한 인민들을 지방 생산현장에 보내는 '붉은 편지 사건'을 계기로 백석은 삼수군 관평리 국영협동농장으로 쫓겨나 양치기로 연명했다.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으니 그의 유배 생활은 37년이나 되었다.

문학은 문학으로 존재할 때 향기를 지닌다. 문학이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도구로 쓰이게 되면 생명을 다 하는 것이다. 백석이 유배지에서 쓴 '관평의 양'이라는 산문은 그래서 슬프다.

/김윤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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