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꽃]풀꽃과 더불어

권성훈

발행일 2018-09-04 제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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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베란다/난초가 죽고 난 화분에

잡초가 제풀에 돋아서/흰 고물 같은 꽃을 피웠다.//

저 미미한 풀 한 포기가

영원 속의 이 시간을 차지하여

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여

한 떨기 꽃을 피웠다는 사실이/생각하면 할수록/신기하기 그지없다.//

하기사 나란 존재가 역시

영원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며/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며

저 풀꽃과 마주한다는 사실도/생각하면 생각할수록/오묘하기 그지없다.//

곰곰 그 일들을 생각하다 나는/그만 나란 존재에서 벗어나

그 풀꽃과 더불어//

영원과 무한의 한 표현으로/영원과 무한의 한 부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사랑으로//

이제 여기 존재한다.

구상(1919~2004)


권성훈 교수(201807사진)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존재하는 것들의 존재방식을 환원한다면 시―공간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나'란 누군가 있었던 자리에 잠시 머물렀다 돌아가기에 '지금―여기'는 살아있음을 알리는 표상이 된다. '난초가 죽고 난 화분'에서 또 다른 '잡초가 제풀에 돋아'나듯이, "나란 존재가 역시" '영원 속의 이 시간'과 '무한 속의 이 공간'을 임차하고 '흰 고물 같은 꽃'을 피워 올리고 있는 것. 그러나 쓸모없이 보이는 '풀꽃'도 누군가에게는 기쁨과 희망으로서 쓸데 있게 다가가듯이, 자아를 찾는 것도 이처럼 유의미한 원리로 작동된다. 길가에 홀로 핀 풀꽃을 마주하고 생각이 생각 속으로 이어질 때 '그만 나란 존재에서 벗어나' 나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풀꽃'만 남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영원과 무한 사이'에서 살아있음을 증명할 '한 표현'이 있다면 '한 부분'을 인정하고 '한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쓸데없이 쓸모 있는 척하는, 당신도 '이제 여기' 진정으로 존재하게 되리니.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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