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없는 인천 소재 공공기관 이전·(3·끝)]인천 경제성장 견인축인 인천 공단의 역사

부평·주안·남동 수출기지화… 인천 '제조업 도시'로 발돋움

윤설아 기자

발행일 2018-09-13 제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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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대규모 수출산업단지 조성 '러시'
난립 공장들 집적 주거환경 개선
경인고속도 등 인프라 성장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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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만도시 인천에 설립된 여러 수출단지와 공업단지는 인천의 경제 성장을 견인한 큰 축이었다.

경제 기반이 허약했던 1960년대 정부는 경제적 자립을 위해 수출 주도형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웠다. 이 계기로 인천에는 대규모 수출산업공단이 설립됐고 인천은 '제조업 도시'가 되었다.

가장 먼저 설립된 것은 1965년에 착공해 1969년 완공된 부평 인천수출산업공업단지였다.

인천상공회의소가 2005년 발간한 '인천상공회의소 120년사'를 보면 정부는 수출산업단지 조성 지역으로 서울과 인천이 적격하다고 판단했다. 서울 구로에 제1~3단지, 인천 부평에 제 4단지, 주안에 제 5~6단지를 조성하는 계획이다.

인천은 인천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지역 경제 발전을 위해 산단 유치와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부평국가산업단지로 불렸던 제 4단지의 50여개 입주 업체 중에는 섬유 업체가 가장 많았는데, 이는 훗날 노동운동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

주안국가산업단지라 불리는 제 5단지, 제 6단지는 폐염전을 매립해 조성됐으며 각각 1973년과 1974년 완공됐다. 이러한 산업단지가 생기기 전 공장들은 인천 도심지역 곳곳에 분산돼 있었다.

공장들이 거주지, 상업지에 위치해 있어 도시발전을 저해하는 것은 물론 소음, 매연, 가스 등으로 시민 건강을 위협했다. 공단 조성은 시민의 주거 환경 개선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현재도 공단 인근 주민들은 악취와 소음에 시달리고 있기도 하다.

1980년대 남동구 고잔동 폐염전에 남동공단이 들어서면서 인천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당시 정부는 1976년도에 주안·부평산단에 입주하지 못하고 난립한 '용도부적격 업체', 소규모 영세 공장에 퇴출 명령을 내리고 충남 아산 등 지방으로 이전시킨다는 계획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용도부적격 업체'는 746개에 달했다고 한다.

인천지역 영세업체들은 지방으로 내려가면 결국 공장 문을 닫고 망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남동공단 설립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진 고(故) 최정환 인천상공회의소 회장이 폐염전 자리에 공단을 유치해 달라고 4년여 동안 청와대·국무총리실·국회 등을 쫓아다니면서 무려 18차례나 건의를 하고 다녔다고 할 정도다.

제조업 중심의 인천 경제는 높은 수출 신장과 내수 증가로 1982~1986년 상승 국면에 접어들어 1986년 제조업 가동률 최대 79.6%를 기록했다. 생산 지수와 고용 지수도 날로 연일 증가했다.

이는 경인고속도로 건설, 인천항 제2도크 축조 등 거대 인프라 건설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여기에 최초 기술인 양성 기관인 국립 중앙직업훈련원이 부평에 들어서면서 인천에서 자란 기술인들은 전국에 진출, 대한민국 산업 경제를 이끄는 '산업 역군'의 역할도 했다.

현재도 인천은 제조업 부흥을 위한 뿌리산업 육성, 기술인 양성 등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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