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주고받을 때마다 꼭 사용
때로 말보다 선명하고 효과적 전달
실제 표정 숨긴채 습관처럼 눌러
만사에 지친 우리 기대고 싶은 것
대신 감정노동하는 노고 짠해진다
박소란 시인 |
때로 말보다 선명하고, 그럼으로써 효과적으로 의사를 전달할 수 있지만 사실 이모티콘을 쓰는 일은 그 자체로 재미있다. 앙증맞고 귀여운 이모티콘 캐릭터들은 채팅창 이편과 저편을 두루 웃게 한다. 실제 나는 전혀 유머러스한 사람이 아님에도 몇몇 이모티콘 덕분에 대화를 덜 지루하게 이끌 수도 있다. 일순 우리는 화기애애해진다. 어려운 부탁을 하거나 또 그런 것을 거절할 때도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정말 미안" 뒤에 눈두덩이 퀭한 오리의 얼굴을 붙여둘 수 있으므로. 이따금 "죄송해요 좀 늦을 것 같아요" 하고 엉엉 울면 상대는 "괜찮아요 천천히 오세요" 하며 활짝 웃는다. 순한 동물의 표정을 빌려. 그럴 땐 어쩐지 마음이 놓인다. 만약 이모티콘이 없었다면 관계를 맺고 잇기란, 세상을 살아가기란 훨씬 팍팍했을 것이다.
무뚝뚝한 성격의 내가 장난기 가득한 이모티콘들을 거리낌 없이 늘어놓는 것을 보고는 놀랍다거나 의외라거나 하는 반응을 보이는 이도 있지만, 한편 속내를 금세 간파해버리는 이도 있다. "뭐냐? 또 이모티콘으로 대충!" 예민한 사람은 눈치채곤 한다. 딱히 하고 싶은 말이 없거나 이렇다 할 대답이 떠오르지 않을 때, 애써 떠올리기 귀찮을 때,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을 가볍게 그렇지만 상대의 기분을 해치지 않고 모면하고 싶을 때에도 슬그머니 이모티콘을 앞세운다는 것. 한두 개의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예의를 차린다는 것. 그러므로 "대충!" 하는 지적은 좀 뜨끔하다. 그러나 이는 단지 나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메신저 단톡창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글보다 이모티콘이 많은 경우가 심심찮다. 우리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이때의 이모티콘이 품은 의미를. 그 속내 따위 아랑곳없이 어피치도, 프로도도 여전히 해맑지만.
이 지나친 해맑음 때문일까. 이모티콘 가득한 대화를 주고받다 막상 실체를 대면했을 때, 상대가 조금도 다정하지 않은 사람임을 알아버렸을 때 우리는 적잖이 놀란다. 실망한다. 왜 너는 이모티콘이 아닌가 말이다. 진실은 늘 그렇듯 불편한 것. 최근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저만치 멀찍이 선 사람과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본의 아니게 보게 된 것이다. 환한 표정의 이모티콘을 연이어 날리는 그가 실제로는 전혀 웃고 있지 않은 것을. 이모티콘 뒤의 표정이 꼭 이모티콘 같을 수야 없는 법이지만 그 모습이 어쩐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습관처럼 이모티콘 버튼을 누를 때의 나, 나 자신의 굳은 표정이 연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렇듯 모두 이모티콘 뒤에 숨어 있구나. 웃을 수 없을 때도 웃는 척, 괜찮지 않을 때도 괜찮은 척. 전혀 좋지 않은 순간에도 '좋아요'를 빼먹지 않듯이. 속엣말을 잔뜩 늘어놓은 뒤 장난이라는 듯 ㅋㅋㅋ를 붙이는 심정과도 같은 것일 테지.
그렇다면 우리는 왜 좀 더 솔직할 수 없나. 진짜가 될 수 없나.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누운 이모티콘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만사 힘든 것이다. 쉬고 싶은 것이다. 기대고 싶은 것이다. 이모티콘에게라도 좀. 어째서 우리는 이토록 지쳤나. 우리를 지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어느 틈에 진심을 드러낼 여력마저 잃고 살게 된 건지 알 수 없지만 새삼 우리 참 애쓴다는 생각. 이 와중에도 과장된 'OK'를 그리며 웃고 있을 또 다른 내가 떠오른다.
그나저나, 불철주야 헌신하는 이모티콘을 생각하면 조금 짠하다. 격한 감정노동 뒤에 점차 소실될 이모티콘의 진짜 마음이 걱정스러워진다면, 실없는 소리 말라 핀잔을 듣겠지만. 그렇지만, 이모티콘의 노고는 과연 누가 덜어줄 것인가.
/박소란 시인
<저작권자 ⓒ 경인일보 (www.kyeongin.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