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전 인천차이나타운 회의청에서 열린 '옛 청국영사관 회의청 복원 기념식'에 참석한 화교들과 인천대 관계자들이 건물 내 조성한 화교 역사 전시관을 둘러보고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
40년 넘게 방치 '옛 청국 영사관'
건물 개보수 전시관으로 새단장
개화기자료 등 근대유산 한자리
차이나타운 되살릴 랜드마크로
한국 화교 136년 역사를 상징하는 인천차이나타운 회의청(會議廳·옛 청국영사관 부속 건물)이 시민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40년 넘게 방치된 채 굳게 닫혔던 회의청이 문을 열면서, 인천차이나타운의 명성을 회복할 마중물로 떠오를지 관심이 쏠린다.
인천화교협회와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은 17일 오전 인천 중구 인천차이나타운에 있는 회의청에서 '옛 청국영사관 회의청 복원 기념식'을 열었다.
인천화교협회 건물 뒤편에 있는 회의청은 초대 청나라 영사로 부임한 가문연(賈文燕)이 1910년께 지은 것으로 알려진 근대건축물이다.
당시 인천 제물포 개항장에는 청나라가 관리하는 치외법권 지역인 청국조계가 설정돼 있었고, 이를 관할하는 청국영사관이 있었다. 회의청은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청국영사관 부속건물이다. 인천에서 출발한 한국 화교 역사의 본산인 셈이다.
인천화교협회조차 1970년대 이후로는 회의청을 사용하지 않아 40년 넘게 빈 건물로 방치됐다. 기와와 지붕이 낡아 건물 안으로 비가 새는 등 상당히 훼손된 상태였지만, 100년 이상 된 건축물이라 보수가 어려웠다는 게 인천화교협회의 설명이다.
회의청 복원 프로젝트를 추진한 인천대 중국학술원은 6개월 동안 약 1억5천만원을 투입해 기와와 지붕을 수리하고, 건물 내부를 전시관으로 꾸몄다.
중국학술원이 수년간 발굴·연구한 인천 화교 관련 자료 3천여건 가운데 역사적 가치가 있는 원본 자료들을 전시했다.
'1910년대 청국조계지도'를 통해서는 당시 인천차이나타운에 중국인들이 어떻게 길을 내고, 어떠한 건물들을 구성했는지를 살필 수 있다.
'1911년 호구 조사표'나 '1935년 화교 이주 연혁', 1915년 인천경찰서에서 발행한 '매장·화장 확인증' 등을 통해선 화교의 생활상도 엿볼 수 있다. 각종 자료를 토대로 복원한 개항기 차이나타운 거리를 VR(가상현실) 체험기로 재현했다.
최근 복원작업을 마친 인천차이나타운 회의청. 개항기인 1910년께 옛 청국영사관 부속 건물로 지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
송승석 인천대 중국학술원 부원장은 "기존 회의청 기와는 1970년대의 이른바 '새마을 기와'였는데 그 이전에는 중국 기와였는지, 한국 기와였는지 확인되지 않았다"며 "회의청의 변천과정을 품는다는 차원에서 1970년대 새마을 기와를 공수해 그대로 복원했다"고 설명했다.
인천차이나타운은 최근 몇 년 사이 짜장면집만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개성을 잃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기도 하다.
인천 화교들은 실질적인 근대 화교 유산인 회의청을 시민에게 개방해 인천차이나타운의 역사성과 명성을 회복하고, 지역의 활기를 되찾을 기회로 삼고 싶어한다.
손덕준 인천화교협회 회장은 "130년이 넘는 인천 화교의 역사를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 지역사회와의 소통도 넓히고자 한다"며 "한국은 물론 해외 관광객이 인천차이나타운에서 꼭 찾는 명소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국 화교의 역사는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리훙장(李鴻章)이 이끄는 청나라 군대가 인천에 주둔할 때 함께 들어온 군역상인 40명이 정착하면서 시작됐다.
인천에서는 차이나타운을 중심으로 4~5세대까지 뿌리를 내렸다. 중국 산둥성 출신이 가장 많고, 국적은 대부분 대만이다.
이날 기념식에 참석한 이지성 주한타이베이대표부 부대표는 "한국 화교 사회에서 회의청 복원은 깊은 의미를 가진다"며 "앞으로 회의청이 대만, 중국 대륙, 한국을 잇는 문화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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