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

조선 유학생들, 도쿄서 외친 '2·8 독립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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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전해진 독립의 열망(1월 10일자 15면보도)은 식민 본거지인 일본 동경(도쿄)에까지 급속히 전파됐다.

소약속국동맹회의에서 제기된 '조선과 일본의 합방은 무효'라는 주장에 힘입어 동경의 혈기왕성한 조선 유학생들은 궐기하기 시작했다.

1919년 2월 8일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처음 열린 유학생대회는 곧 '조선독립청년단대회'로 명칭을 바꾸고 본색을 드러냈다.



그 곳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하고 '독립선언서'도 낭독됐다. 이것이 '2·8독립선언'의 전말이다. 이는 곧 조선독립운동의 신호탄이 됐던 3·1 만세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오늘날 다시 찾은 도쿄는 2·8독립선언의 자취를 찾을수 없었다. 2·8 독립선언을 이끈 학생 상당수가 와세다 대학 출신인데, 그 중 '신간회 도쿄지회'가 와세다 대학 스코트홀에서 창립됐다.

그러나 현재 와세다 교회건물로 사용되는 스코트홀을 방문했을 땐 신간회 창립과 관련한 어떠한 이야기도 들을 수 없었다.

도쿄 히비야 공원도 마찬가지다. 2·8독립선언이 발표된 4일 후 재일 유학생 100여 명이 히비야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다시 발표하고 만세운동을 벌였다.

비슷한 시기 같은 장소에서 조선청년독립단 민족대회촉진부 취지서가 배포되고 시위운동이 일어났지만 오늘날 히비야 공원에는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기억해야 하는 것을 기억하지 않은 땅에서 3·1만세운동 100년의 의미를 되새긴다.

/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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