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그 애는 작아도 너무 작아

1987~1991년 서울의 백골단
2017년 시리아 알레포의 구조대원
두곳의 장소 설정한 연극 '더 헬멧'
두 사건으로 관객 울림 못 준다면
그 거리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전문가 권순대2
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흥미로운 상황을 발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연극이 있다. 상황은 연극의 이야기를 여는 문이다. 언제, 어떤 장소에서, 어떤 인물이 그 문을 여는가에 따라 이야기가 결정된다. 이 문은 연극의 이야기 안에 있다. 그 문을 여는 방식에 변화를 준 연극이 바로 '더 헬멧'(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1월 8일~2월 27일)이다.

'더 헬멧'은 두 개의 장소와 네 개의 방을 설정하여 관객에게 선택하게 한다. 두 개의 장소는 각각 서울과 알레포이다. 서울과 알레포는 다시 빅 룸과 스몰 룸으로 나뉜다. 경우의 수는 넷(더블 캐스팅의 경우까지 더하면 배로 늘어난다.) 이다. 이런 식이다. 관객은 서울의 빅 룸 혹은 스몰 룸 중에서, 알레포의 빅 룸 혹은 스몰 룸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어떤 장소와 방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관극할 연극이 결정된다.



이제 연극 안으로 들어가 보자. 서울. 1987년~1991년 어느 서점의 지하실. 대학생과 백골단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알레포. 2017년 시리아 알레포의 어느 건물. 테러리스트와 화이트 헬멧 구조대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런데 왜 서울과 알레포일까.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제목이 강렬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백골단의 헬멧과 구조대원의 헬멧이 쉽게 겹친다. 폭력으로 인해 사라진 일상의 삶이 가져온 잔혹함을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왜 서울과 알레포일까를 여전히 묻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 현실에서 시리아가 너무 멀리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거리의 문제가 핵심이다. 어떤 사건이든 그 사건이 누군가의 문제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사건이 일어난 지점과 그 사건을 전달받는 지점 사이의 거리가 좁혀져야 한다. 이 거리는 단지 물리적인 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건의 수신자가 그 사건에 반응하여 자신의 문제로 느끼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환가능성의 거리이다. 사건 앞에서 공감과 연대할 수 있는 역량이 거리를 좁히는 힘이다. 매몰된 건물 잔해에서 식어버린 아이를 보며, "이 애는 작아도 너무 작아"라고 말하는 시리아 알레포의 구조대원의 대사가 관객에게 울림을 주지 못한다면 그 거리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1987년부터 1991년 사이를 다루는 서울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시위 현장에서 마주한 상대를 향해 "안 미워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는 상황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오히려 시리아 알레포보다 더 멀게 느껴질 수 있다. 백골단인 그는 어제까지 대학생이었다. 대학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가 마주한 전투조는 불과 얼마 전까지 함께 수업을 듣던 동료였다. 그들이 서로에게 "안 미워할 수 있을까"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은 얼마나 끔찍한가. 서울 이야기에서 서점 지하실을 공간으로 설정한 것은 무척 흥미로운 부분이다. 요즘도 그러하지만 서점이 책만 파는 곳은 아니지 않는가. 당시 서점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헤아리는 정도에 따라 관객은 서울 이야기의 시간적 거리를 저마다 갖게 된다.

이제 연극 밖으로 나와 보자.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2009년 10월 17일, 몰디브 기리푸쉬섬 앞바다 해저 6m. 대통령과 각료들이 온실가스 배출규제 촉구 결의안에 서명하는 장면의 사진. 이 뉴스는 세계에 전해지며 곧바로 이슈가 되었다. 하지만 10년 가까이 지난 오늘까지 몰디브가 처한 상황에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뉴스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뉴스는 금세 묻혔다. 해저 회의 퍼포먼스는 뉴스로 소비되고 정말 퍼포먼스로 그쳤다. 세계의 시민들이 공감과 연대의 장으로 나아가게 하는 그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말을 걸어야 그 거리를 좁힐 수 있을까.

사물이 놓인 지점이 달라지고 그 연결하는 고리가 바뀌면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길까. 세계를 바라보는 위치에 변화가 생기면 우리의 삶과 세계가 움직이게 될까. 연극 '더 헬멧'은 그것을 궁금하게 하는 공연이다. 어떤 방을 선택할지는 여러분이 결정해야 한다.

/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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