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재 칼럼]가지 않은 길

이영재

발행일 2019-01-29 제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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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평화 지속' 한번도 경험 못한것들
북한 '핵 동결'에 사실상 美가 '보유 인정'
새로운 경험할까봐 두려운게 솔직한 심정
안보는 한번 무너지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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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재 논설실장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읽어주는 50세 중반의 국어 선생님 목소리는 진지했다. '어린 너희가 뭘 알겠어?'라는 표정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얼마나 많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야 하는지 지금 너희는 잘 모를 것이다. 많게는 서너 번, 적게는 수백 번 결단의 순간과 맞닥뜨리게 된다. 나 역시 그랬다. 우리가 숲 속을 걷다가 만나는 두 길을 모두 갈 수 없는 것처럼, 인생의 앞에 펼쳐지는 여러 갈래 길을 동시에 갈 수는 없다. 갈 수 있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사기꾼이다.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그렇다고 두려워할 건 없다. 어차피 그게 인생이니까." 시도 좋았지만, 책도 없이 시 전문을 한 자의 틀림도 없이 외운 선생님을 우리는 신뢰했다. 어린 나이에 선생님의 그 말이 왜 그렇게 쓸쓸하게 들렸는지 그때는 몰랐다.

그날 교실 분위기가 무거웠던 건 시의 첫째 연과 마지막 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숲 속에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1990년대는 버라이어티 예능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인기가 높았다. '몰래카메라' '브레인 서바이버' '양심 냉장고' '러브 하우스'도 그랬지만 개그맨 이휘재의 '인생극장'은 내 맘대로 내용과 결론을 바꾸는 지금의 '인터렉티브 영화' 콘셉트로 인기를 끌었다. 매번 선택의 갈림길에 서고, 그의 선택에 따라 이야기가 각기 다르게 전개되는, 특히 "그래! 결심했어"란 유행어도 남긴 인기코너였다. 그 '인생극장'을 보면서 '가지 않은 길'이 생각났다. 선생님의 말처럼 그동안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결단의 순간들이 있었다. 문과가 아닌 이과를 택했다면, 그때 공부보다 운동권 학생이 되었다면, 이 직장이 아니라 저 직장을 택했다면, 이 사람이 아니라 저 사람을 만났다면 등등 '그때 저 길로 갔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라는 생각을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 봤을 것이다.

'가지 않은 길'이 다시 떠오른 건 3년 전 "지금 제 가슴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습니다"라던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를 들으면서였다. 그리고 요즘은 매일 문 대통령의 말처럼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를 경험하고 있다.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거의 매일 벌어지는 검경의 압수수색은 논외로 치더라도 대법원장의 구속, 눈만 뜨면 나타나는 미세먼지, 일자리정책 앞에서 탄식하는 젊은이들을 보는 것은 물론, 대통령이 국민연금에 주주권행사를 직접 지시하거나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를 발표하는 것도, 투기의 의혹 국회의원이 오히려 국민들을 향해 큰소리 치는 것도 생애 첫 경험이다. 이웃 일본과 최악의 관계도 새로운 경험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간은 걸리겠지만, 우리가 제정신을 차리고 왔던 길로 다시 가서 다른 길을 택한다면 해결되는 것들이다.

문제는 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적인 것들에 있다. 지난해 남북 정상 간 세 번의 회담, 그 과정에서 도출된 9·19 남북 군사 합의서로 인해 발생한 '불안한 평화의 지속'도 실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조만간 북한의 핵 동결이라는, 사실상 미국이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는 새로운 경험을 할까 두려운 게 솔직한 심정이다. 앞엣것들과 다르게 안보가 한번 무너지면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때 국어 선생님은 이런 말도 했었다. "분명한 건 어느 한 길을 택할 경우, 다른 길을 택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인생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무서운 건 택한 그 길이 꽃길인지 아니면 가시밭길인지는 끝까지 가봐야 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대한민국의 운명을 담보로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이영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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