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

[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5)]민중이 이끈 수원의 3·1만세운동

일어나자, 짓밟힌 민초들아… 민중을 깨운 서장대의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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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1919년 3월16일 '화성 제일 봉우리' 만세
지식인·지도층 중심서 시민 확산 변곡점
소작농 전락 농민 가세·상인들 철시투쟁
김향화 열사 등 기생 33명 봉수당서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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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차갑다. 옷깃을 여미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경기도청 후문에서 출발해 천천히 언덕을 걸어 올랐다.



지금처럼 잘 닦인 아스팔트 길도 아니었을텐데, 그 날 수백명의 선조들은 흙으로 뒤덮인 언덕길을 힘차게 올랐을 것이다.

겨울바람만큼 매서운 현실에 분노하면서, 함부로 내뱉지 못한 울분을 토하기 위해 맨주먹을 불끈 쥐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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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대

# 민중의 힘으로 이어진 수원의 3·1운동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의 제일 봉우리, '서장대'에 도착했다. 수원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시원한 풍광만큼 이 곳은 그 옛날 수원의 중심이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같은 날 수원 화성의 '방화수류정'에서도 울려 퍼졌는데 수원의 지식인과 학생이 주축이 돼 수원면 화성 인근에 살던 지역민들과 함께 3·1 운동이 일어났다.

이때의 시위로 교사 김노적이 주도자로 검거됐고 일제의 지독한 고문으로 머리 한쪽이 함몰되고 왼쪽 손목이 으깨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로부터 15일이 지난 3월 16일은 수원 종로거리에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인다는 '장날'이었다.

수원화성 서장대로 사람들이 몰렸다. 잔인한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3월 1일보다 더 많은 민중이 모여들었다. 3월 16일의 시위는 3월 1일과 분명 달랐다.

1일의 시위가 지식인과 학생이 중심이었다면, 16일의 시위는 일반 민중이 더 많았다. 서장대를 중심으로 연무대 등지에서 일제히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고 수백의 민중들이 수원 종로거리로 쏟아졌다.

이 날의 시위 역시 일제 경찰과 헌병 등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주동자가 검거됐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종로의 시장상인들은 생업을 포기한 채 가게 문을 닫고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철시투쟁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서장대를 내려와 반대편으로 조금 걸어가면, '3·1독립운동 기념탑'이 있다.

1969년 3월 1일 국권 회복을 위해 항쟁한 선열의 성업을 길이 빛내고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기념탑인데, 삼일동지회가 수원시민이 자주 찾는 팔달산 중턱에 옮겨놓은 것이다. 이 기념탑 옆, 안내판에 적힌 숨겨진 이야기가 뭉클하다.

본래 일제 강점기 당시 수원경찰서 노구찌 소위가 3·1 운동의 여파로 격분한 민중에게 맞아 죽었고, 일제가 노구찌를 추모하기 위해 순국비를 세웠는데, 광복 후 그 순국비를 허물고 그 위에 당당히 3·1운동 기념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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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 기념탑.

그 건립비용도 수원시내 학교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했다고 적혔다.

서장대를 내려와 수원 화성행궁으로 향했다. 평일임에도 행궁은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특히 고등학교, 대학교 학생들이 이 곳을 많이 찾았고 외국인 학생들도 꽤 눈에 띄었다.

정조임금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을 열었다는 '봉수당'에 도착했다.

정조와 혜경궁 홍씨의 아름다운 추억만 이 곳에 남았더라면. 그러나 봉수당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적이 있다. 일제가 이 곳을 자혜의원으로 사용하면서다. 자혜의원은 1910년 강제합방을 강행한 일제가 조선인에게 자애로운 은혜를 베푼다는 미명 아래 세운 병원이다.

조선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화성행궁을 파괴하던 일제의 눈에 행궁의 중추인 봉수당은 식민지배의 수모를 안길 수 있는 상징이었다. 마구잡이로 봉수당을 자혜의원으로 활용하던 일제는 심지어 1923년 완전히 봉수당을 헐고 2층짜리 벽돌건물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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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1923년 봉수당을 허물고 세운 경기도립병원·자혜의원 사용시절 옛 봉수당.

가슴 찢어지는 역사지만, 봉수당은 수원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장면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1919년 3월 29일 기생이었던 김향화 열사가 기생 33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자혜의원이었던 봉수당 앞 북군영 건물은 수원경찰서로 활용되며 총칼을 찬 헌병 경찰이 버티고 있었다.

만세를 외치고 곧바로 헌병에 붙잡혔을 것이다. 그 순간의 김향화를 떠올리는데, 재잘재잘 떠들며 봉수당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젊은 학생들이 보였다. 이들 중 그 순간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우리가 웃으며 봉수당을 다시 마주할 수 있는 것은 그 날 퇴로조차 마련하지 않은 채 나라 뺏긴 울분을 토하며 의로운 삶을 선택한 스물 셋, 꽃다운 젊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비록 아픈 과거지만 봉수당 한쪽 끝에 자혜의원 시절의 사진이라도 걸어둔다면 우리가 봉수당을 오래도록 기억하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현재 봉수당은 진찬연을 재현한 것 외에는 다른 흔적이 없었다.

씁쓸하게 행궁을 빠져나와 걷던 중 복원사업현장을 가리기 위해 설치해둔 안전펜스 위에서 자혜의원 시절의 봉수당 사진을 발견했다. 그렇게 한참을 그 자리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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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대한민국독립기념비·복원된 봉수당.

광복후 日警 순국비 허물고 기념탑 세워
복원 봉수당, 만세운동 흔적없어 아쉬움
수원시, 올 100주년 상징물 건립비 모금

# 100년의 함성, 시민의 힘으로 다시 외치다


수원의 독립운동은 3·1 만세운동의 '변곡점'으로 평가해도 무방하다. 사회 지도층으로 분류되는 지식인과 학생이 중심이 돼 3·1운동이 시작됐지만, 수원에 이르러서는 그 양상이 달라졌다.

일반 민중이 만세 운동의 중심이었다. 먹고 사는 것에는 지장이 없던 지도층과 달리, 나라 뺏긴 설움을 삶 속에서 온몸으로 체감한 이들이 당시의 일반 민중이었다.

앞서 설명한 종로거리에서 일어난 상인들의 만세운동과 더불어 수원 서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이 그 대표 사례다.

수원 지역의 소작농 대부분이 일본인 농장의 소작농으로 전락했는데, 특히 서호 부근에 있던 권업모범장은 수탈의 핵심이었다.

서호에서 시위가 거세게 일어난 것도 권업모범장과 일본 대지주의 농장이 서둔벌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만세운동은 당시 수원 민중의 삶과 직결된 '생존권'의 문제였고 그만큼 절박했다.

그래서 서울의 시위보다 훨씬 가열차고 적극적인 형태로 시위의 양상이 변했고 이는 곧 다른 지역에까지 강력하게 전파되는 효과를 낳았다.

이에 3·1독립운동 100주년을 준비하는 수원시의 마음가짐도 남다르다.

수원시는 100년 전 과거 민중이 앞장섰던 그 날들의 시위처럼, 100주년을 기리는 중심에 '시민'을 앞세웠다.  100주년을 기념하는 상징물 건립도 시민들의 자발적인 기부금을 토대로 세우겠다는 방침이다.

또 '기억하는 백년의 울림, 기약하는 백년의 미래'를 주제로 시민들 스스로 100주년을 기억하는 시민문화제를 진행한다.

3월 1일에만 기억하는 단발성 행사 대신, 100년 전 역사를 오래도록 기억하는 다양한 시민교육도 마련했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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