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남부의 중추도시인 수원은 그 중에서도 대한 독립의 의지를 광범위하게 전파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수원의 3·1 독립운동은 '민중'이 중심이다. 양반가와 지식인, 학생이 중심이 됐던 서울의 만세운동과 달리, 농민과 상인, 여성 등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던 서민 계층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일제에 의해 삶이 송두리째 억압받았던 울분이 3·1운동을 계기로 폭발한 셈이다.
현재의 수원, 화성, 오산이 모두 '수원군'이었던 당시의 수원지역은 3월부터 4월까지 곳곳에서 연쇄적으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1919년 3월 16일, 장날을 틈타 수백명이 모인 수원화성 서장대 만세운동을 비롯해 3월 23일, 지금의 수원역과 서호 일대에서 일제히 벌어진 농민들의 만세 시위와 3월 29일 행궁 봉수당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던 조선 기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주도자가 검거되고 참여한 이들이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는 상황이 퍼지면 퍼질수록 시위에 참여하는 인원과 계층은 늘어나 끊임없이 시위를 주도하고 참여했다.
이에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수원시도 시민과 함께 이들 지역의 숨은 독립운동가와 그들의 삶을 조명하는 데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도서, 다큐멘터리, 연극 등 다양한 형태로 이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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