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광장]공동체 구성원의 자격, 기여론과 동정론

이완

발행일 2019-02-13 제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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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소수자였던 프레디머큐리
뛰어난 음악적 재능으로 사랑받아
사회기여 가능 여부로 구성원 판단
동조 못하는 사람들 분리 배제 안돼
기준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


수요광장 이완2
이완 아시아인권문화연대 활동가
전설적인 록그룹 퀸과 리드싱어인 프레디머큐리의 생애를 다룬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와 그의 음악이 세대를 넘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은 것이 흥행의 주요 이유였다고 한다.

프레디머큐리는 아프리카의 잔자비르지역, 현재의 탄자니아에서 출생했다. 부모의 국적은 인도였고, 그는 인도인중에서 아주 소수민족인 페르시아계였으며, 20세 전후로 난민이 되어 영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불을 숭배하는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다. 그리고 프레디머큐리 자신은 성소수자였고, 튀어나온 앞니 때문에 미남은 아니었다는 평이 있다.

출생지, 민족, 종교, 성적지향, 외모 면에서 그는 사회적 소수자였다. 게다가 '난민'이었다. 하지만 그는 뛰어난 음악적 재능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그와 관련된 국가인 이란, 인도, 영국 모두에서 그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한다.

그런데, 만약 사회적 소수성의 집합과 같은 프레디머큐리가 이런 모든 불리한 배경을 극복할 만큼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이 없었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모든 소수자가 대중 다수로부터 뛰어난 재능으로 사랑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럼 특정 분야에 뛰어난 재능이 없거나, 속한 공동체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역할과 기여를 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일까?

작년에 한국사회 공동체 구성원의 자격과 관련하여 유심히 살펴볼 법원과 정부의 결정이 있었다. 마크(가명)는 1999년 한국에 체류 중이었던 나이지리아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몇 년 후 아버지가 불법체류자로 단속되어 추방되고 난 후, 어머니와 동생들과 한국에 남아 체류비자 없이 줄 곧 생활하며, 한국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되는 처지였던 마크는 공장에 취직해 일을 하다 2018년 단속에 적발되었고, 외국인보호소에서 법원의 판결을 받게 된다.

법원은 마크가 부모의 국적국가에 가본 적이 없고 부모국적국의 언어도 못하는 반면,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모두 능통하다는 점 그리고 마크가 한국에서 12년간 초등, 중등, 고등학교까지의 과정을 성실히 마쳤다는 점을 들며, 그를 추방하는 것은 한국사회가 그동안 마크에게 투자한 시간과 비용, 노력을 감안할 때, 한국사회에 사실상 손실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체류할 수 있게 하라고 판결했다.

법무부도 매우 이례적인 경우라는 단서를 달아 영주 비자를 주었다. 비자가 없이 장기 체류했던 사람이 영주권을 받게 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이 사례는 이주민과 이주아동의 체류권 보장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환점임에 분명하다.

다만, 마음 한구석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은, 한국체류 허가에 있어 중요한 사유가 '국가와 사회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라는, 기여론과 동정론이라는 점이다. 바꾸어 이야기하면, 국가와 사회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 또는 인권과 인류애를 들먹일 정도로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사연이 없고서야,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이주민과 소수자를 옹호하는 쪽에서도, 개개인의 다양한 정체성을 포용하고 인정하는 것이, 결국 국가 사회의 생산성과 지속가능성,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기여론을 강조하며, 동정적 시각과 함께 주류사회를 설득하려고 한 적도 있다.

그런데 국가 사회에 대한 기여 가능 여부로 구성원의 자격을 판단한다면, 결국 개개인이 얼마나 그 사회에 필요한가를 주류의 기준으로 분리하고 결정한다는 것이고, 그 기준에 부합하거나 동조하지 못하는 사람은 분리 배제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잣대가 항상 외부로만 향하는 것이 아니며, 한국 사회 내부에서도 똑같이 작동한다. 모두가 치열하게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하는 현재의 한국사회를 기존의 한국사회 구성원 어느 누구도 원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국립소록도병원 박물관에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모두 다 모두가 다 이름 있는 모든 것이다.' 사람 한명 한명이 각자의 존재만으로 존중받는 세상, 사실은 기존 한국 구성원 모두가 원하는 세상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제, 구성원의 자격에 대한 기준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이완 아시아인권문화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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