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실보다 이벤트에 치중한 '삼일절 100주년 기념 행사'

인천시 만세운동 재현 장소 '창영초'

박경호 기자

발행일 2019-02-20 제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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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발상지' 주장 확실치 않아
'인천고가 먼저' 해석도 가능한 탓
지역범위 설정 등 역사재정립 절실

인천시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행사성 이벤트에 몰두할 게 아니라 기초적인 자료부터 수집해 인천의 3·1운동 역사를 재정립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인천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동구 창영초등학교에서 3·1절 기념행사를 열고 만세운동을 재현하기로 했다.

1919년 창영초교에서 인천 첫 만세운동이 시작됐다는 이유인데, 창영초교가 인천 3·1운동 당시 첫 만세운동 장소인지는 아직 뚜렷하지 않다.

인천시가 3·1운동 관련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오류를 바로잡기보다는 대대적인 이벤트성 행사에만 치중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인천시가 다음 달 1일 오전 창영초교에서 처음으로 3·1절 기념행사를 개최하면서 이 학교가 인천 만세운동의 발상지라고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다.

시가 2013년 펴낸 '인천시사'도 1919년 3월 초부터 보통학생(창영초교) 동맹휴학을 시작으로 시내 중심부와 외곽에서 줄기차게 만세시위운동이 이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창영초교 학생들이 첫 만세운동을 펼쳤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이병헌이 1959년 쓴 '삼일운동비사'(三一運動秘史)에는 인천의 3·1운동과 관련해 '3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교) 3~4학년 학생들이 선생이 없는 사이에 학교를 뛰쳐 나와서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 생도들과 합류해 시내 중심에서 시위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삼일운동비사'는 3·1운동 연구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는 저서 중 하나다. 이 기록이 맞는다면 창영초교 학생들에 앞서 인천고 학생들이 이미 만세운동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창영초교 학생들이 3·1운동 초창기부터 나선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만세운동을 인천 최초로 벌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인천의 첫 만세운동은 1919년 인천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달리 볼 수 있지만, 이 부분도 아직 연구가 미흡하다.

인천시가 1973년 발행한 '인천시사'는 3·1운동 때 인천에서 만세운동이 8번 열렸고, 9천명이 집회에 참가했으며, 15명이 투옥됐다고 나온다.

이 통계는 박은식이 1920년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인용했다. 현재까지도 인천지역의 만세운동 통계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1919년 당시 인천부는 지금의 중구·동구와 미추홀구 일부 지역으로 축소된 상태였다.

인천도호부청사가 있는 미추홀구 문학동 일대도 계양·부평지역과 함께 부천군이 됐고, 강화군도 있었다.

1956년 발간된 '경기도지'에 실린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통계를 보면, 부평에서 만세운동이 6번 있었고 950명이 집회에 참가했다. 투옥자도 98명으로 인천보다 많았다.

강화에서도 2번의 만세운동이 있었고, 400명이 참가했다고 나온다.

현재 통용되는 인천의 만세운동 통계는 '중구·동구와 미추홀구 일부'만 범위로 할 뿐이다. 부평·계양지역이나 강화, 옹진, 영종·용유 등지의 만세운동도 반영되어야 한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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