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96]엘지-4 최정상 기업집단을 위한 수직계열화

'화학 중심' 7개 계열사로 기반 다지기

이한구 기자

발행일 2019-02-26 제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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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그룹은 최정상 기업집단을 위한 수직계열화에 박차를 가했다. 사진은 크림통 뚜껑 개발을 계기로 주력사업을 '플라스틱'으로 바꾸게 된 락희화학. /LG화학 제공

치약 원료 글리세린 생산
카본블랙 수요 증가 예상
인천 갈산동에 공장 건설
구인회 '부정축재' 자진신고
국제신보, 휴전후 LG 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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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3월에는 자본금 1억환의 락희유지공업을 설립했다.

락희화학에서 생산하는 치약원료인 글리세린을 생산할 목적이었다. 공장건설자금은 1959년도 유지(油脂)부문의 ICA원조자금 34만달러 등으로 충당했는데 배경은 다음과 같다.

글리세린은 비누의 부산물로 비누를 만들면 자동으로 글리세린이 생산됐다.

당시 비누의 원료인 우지는 소맥, 원면 등과 함께 원조물자로 공급된 탓에 비누공장들은 호황을 누렸으나 글리세린은 애경유지(애경그룹의 주력기업)가 독점 공급하고 있어 원료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다.

차제에 락희화학은 값싼 우지를 이용해 비누도 만들고 부산물로 치약원료인 글리세린도 생산하고자 락희유지를 설립했던 것이다.

1962년 8월에는 자본금 3천만원의 락희비니루공업을 설립했다. 1960년대초 비닐 장판, 스폰지레저, 건축용 비닐타일 등이 국산화되는 등 향후 비닐제품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판단해 부산 연지 공장의 비닐 부문을 분리, 설립한 것이다.

>> 락희유지공업 설립

1963년 7월에는 락희화학과 허진구가 50대50 비율로 한국미공을 설립하고 서울 구로동에 공장을 건설했다. 락희화학 동래공장으로부터 비닐 시트를 조달받아서 인플레터블(inflatable) 장난감을 생산, 수출하기 위해서였다.

1968년 3월 21일에는 미국 컨티넨탈카본사(Continental Carbon Co.)와 50대50의 비율로 합작해 한국 콘티넨탈카본(자본금 2천700만원)을 설립했다.

당시 국내에는 고무제품 보강재로 사용되는 카본블랙이 전혀 생산되지 않았다. 카본블랙은 고무에 탄력과 강도를 더해주는 보강재였기 때문에 고무공업, 특히 타이어제조에는 필수적인 원료였다.

꿩 대신 닭이라고 충주비료공장의 연돌(煙突, chimney)에서 채취되는 탄소알갱이로 고무신을 제조하는 수준이었다.

락희화학은 향후 카본블랙에 대한 수요가 점증할 것으로 예상하고 공장건설을 고려하던 중에 거래관계에 있던 미국 컨티넨탈카본사가 합작을 제의해서 설립했다.

1968년 10월 15일 인천 갈산동의 1만1천여평의 부지에 공장건설에 착수, 1969년 9월 연산 7천500t 규모의 공장을 완공했다.

1962년 5월에는 자본금 10억환의 한국케이블공업(LG전선)을 설립했다.

1960년 4·19혁명과 함께 과거 이승만 독재정권 하에서 탈세, 밀수, 정경유착 등으로 부정 축재한 기업가들에 대한 국민들의 처벌요구가 비등했는데 이병철(삼성), 정재호(삼호), 이정림(개풍), 설경동(대한), 이양구(동양), 남궁련(극동), 최태섭(한국유리) 등 유명 기업인 24명이 연루됐다. 구인회도 탈세액 3천만환을 자진 신고했다.

부정축재자에 대한 단죄 움직임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와 함께 구체화 돼 연루기업인들이 줄줄이 투옥되면서 이병철, 정재호, 함창희(동립산업), 이정림, 최태섭, 설경동, 조성철(중앙산업), 남궁련 등은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상황이 반전돼 정부는 부정축재 기업인들이 보유한 시중은행 주식을 전부 몰수하는 한편 14명의 대표적 기업가들에겐 별도로 비료, 화학섬유, 전선공장 등 5대 기간사업체를 건설해서 국가에 헌납할 것을 명령했다.

>> 1964년 언론사업 진출


구인회는 아세테이트공장과 종합전기공장을 건설하기로 하고 1962년 3월에 서독의 Fuhrmeister사와 295만달러의 차관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동년 4월 7일 군사정부는 구인회에게 전선공장을 건설하도록 통보, 같은 해 5월 5일 한국케이블공업을 설립했다.

그해 10월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 호계리에 전선공장을 착공해 4년여 만인 1966년 4월에 완공했다. 그러나 건설과정에서의 자금난에다 영업전망까지 불투명해 그해 9월에 금성사에 흡수합병 됐다가 1969년에 금성전선으로 분리됐다.

1964년 5월에는 부산 국제신보를 인수해 언론사업에도 진출했다. 1949년 9월 김형두 등에 의해 산업신문으로 설립된 뒤 1950년 8월 국제신보로 개칭됐다.

6·25전쟁 중에는 다소 활성화됐으나 휴전 후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면서 사세가 기울어 LG그룹에 인수됐다. 초대사장으로 국회의원을 역임한 서정귀(徐廷貴)를 임명했다.

이로써 LG그룹은 모기업인 락희화학 산하에 금성사와 한국케이블, 반도상사, 락희유지, 락희비니루, 한국미공, 국제신보 등을 두어 대규모 기업집단을 형성했다. 이 무렵까지 LG그룹은 주로 화학 중심의 수직계열화를 도모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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