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경찰서가 있던 옛 인천영사관 건물 전경. /인천부사 발췌 |
중구 출생… 보통학교 갓 졸업한 이후 구하기 힘든 태극기 직접 그려 제작
1919년 3월 7~8살 동네 꼬마들에 나눠주고 지붕에 꽂거나 흔들며 용동 누벼
경찰서 끌려간 아이들 훈방반면 '시위 주동' 이유 유치장서 사흘만에 풀려나
지인·가족 입으로만 전해져… '한국 美學 선구자'뒤 만세운동 이야기 기려야
이제 갓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14살의 소년이 방에 앉아 하얀 천과 붓, 물감을 펼쳐놓고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붓을 들어 직사각형 모양의 천 한가운데 원을 그려 넣고 그 안을 붉은색과 파란색이 소용돌이치듯 서로 휘감고 있는 태극 무늬로 채웠다.
이어 검은색 물감으로 천의 네 귀퉁이에 건(乾)·감(坎)·곤(坤)·이(離) 4괘를 그렸다. 소년은 그렇게 여러 장을 더 그린 뒤 길고 곧은 나뭇가지에 매달았다.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국기의 지위를 상실한 태극기. 소년은 구하려고 해도 구하기 힘든 태극기를 직접 만들어 마을에서 가장 잘 올려다 보이는 초가집 지붕 위에 꽂았다.
그리고 평소 자신을 따르던 동네 꼬마들에게 나눠주었다. 고유섭과 동네 꼬마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마을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그날의 태극기와 만세가 어떤 의미인지나 알고 소년을 뒤쫓았을까. 두 바퀴째 마을을 도는데 경찰들이 막아섰다. 아이들은 졸지에 경찰서로 끌려갔다.
꼬맹이들은 훈방으로 바로 풀려났지만 만세 시위를 주동한 소년은 경찰서에 갇혔다.
1919년 3월 인천 용동에서 만세 시위를 이끌었던 14살의 소년. 바로 한국 미학(美學)의 선구자라 불리는 우현 고유섭(1905~1944)이다.
1935년경 고유섭이 아내 이점옥(왼쪽), 장녀 병숙양과 찍은 사진. /열화당의 '우현 고유섭 전집' 발췌 |
우리나라 미술사 연구의 초석을 다진 고유섭이 1919년 만세운동에 앞장섰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를 기억하는 지인과 가족의 입으로만 전해져 이어질 뿐이다.
1905년 지금의 인천 중구 동인천길병원 터에서 태어난 고유섭은 1914년 인천공립보통학교(現창영초)에 입학해 1918년 졸업했다.
1918~1919년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상급학교인 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그냥 집에 머물러 있었다.
디자인 전문잡지 '월간공예'는 1988년 6월 특집호로 '미술사학의 거장 고유섭'을 조명했는데 한국 미술문화유산에 끼친 영향력 외에 별도의 지면을 할애해 그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다뤘다.
고유섭의 태극기 제작과 만세운동은 이 잡지에 실린 우련통운 창업자 배인복(1911~1997)의 인터뷰를 통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우현 선생이 태극기를 직접 그려서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고 초가집 지붕 위에 올라가 태극기를 꽂았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모여서 만세를 부른 후 동네를 돌다가 체포되었지요. 7~8세의 어린 아이들은 훈방으로 금방 풀려났지만 우현 선생은 유치장에 있다가 사흘째 되던 날 큰아버지가 찾아가 겨우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인천의 대표 항만물류회사 우련통운의 창립자 배인복은 신포동에서 배다리로 이어지는 골목, 싸리재에서 나고 자랐다고 한다. 싸리재 아랫마을이 고유섭이 태어난 용동 큰우물 일대다.
그의 조카인 배준영 인천경제연구원 이사장(전 인천항물류협회장)을 통해 당시 이야기를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가 있다.
배준영 이사장은 "큰아버지(배인복)께 듣지는 못했지만, 어머니가 '시숙님(배인복)이 9살 때 고유섭 선생이 만들어 나눠준 태극기를 하루 종일 흔들고 돌아다녔다는 얘기를 하신 적이 있다'는 말씀을 했다"며 "우리 집안이 예전부터 용동·경동(싸리재) 일대에 살았기 때문에 고유섭과 이웃인 것은 확실하다"고 했다.
인천의 3·1 운동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고유섭의 만세 일화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어린아이들과 함께했다는 점이다.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예닐곱 살의 어린아이들은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크게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만세시위에 가담했더라도 나이가 어릴 경우 대개 훈방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수형자 기록카드나 판결문을 통해 확인할 수가 없다.
인천보통학교의 동맹휴업도 고학년이 중심이 됐는데 학생 연령대가 최고 25세에 이르렀다는 '인천부사'의 기록을 보면 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들은 청년에 가까웠다.
국가보훈처는 만세운동 당시 어린아이에 대한 기록은 공훈 사료나 통계로 정확하게 나온 것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고유섭과 아이들의 만세 운동 이야기를 재조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유섭이 만세 운동을 이끌었던 날짜를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모교인 인천보통학교가 1919년 3월 6일 동맹휴업을 시작하고 인천 만세 시위의 도화선에 불을 당겼다.
고유섭도 그 시기 동네 아이들과 만세 운동을 벌였다. 당시 인천의 만세 운동을 이끌었던 리더들과 서로 교감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고유섭이 이끈 만세 행렬은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녔을까.
1933년 발간된 '인천부사(仁川府史)'를 보면 어렴풋이나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만세운동이 있던 1919년 인천은 오늘날의 중·동구와 미추홀구 일부에 국한된 작은 마을이었다.
1932년 12월 말 기준 당시 고유섭이 살던 인천 용리(용동)의 조선인 인구는 1천724명이었고, 집은 268채(368세대)였다.
1919년 인천의 조선인이 2만1천여명에서 1932년 5만5천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마 만세운동 당시 용동의 인구는 1천명도 안 되는 적은 수였을 게 확실하다.
수백명의 용동 주민들은 태극기를 들고 마을을 도는 고유섭과 아이들을 응원하고, 만세의 함성을 외쳤을 터이다.
1949년 오늘날의 국기제작법이 만들어지기 전에 사용되었던 태극기들. 왼쪽부터 김구 서명문 태극기,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대한독립만세 글귀가 담긴 태극기, 독립운동가 남상락이 1919년 4월 4일 독립만세 운동에 사용하기 위하여 부인과 같이 손바느질로 만든 태극기. /문화재청 제공 |
우현이 만들어 썼다는 태극기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1883년 고종은 왕명으로 '태극·4괘 도안'의 태극기를 제정·공포했으나 국기 제작 방법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아 4괘의 위치나 태극무늬가 제각각인 다양한 형태의 국기가 사용돼 왔다.
1942년 임시정부가 국기제작법을 일치시키기 위해 국기 통일양식을 제정해 공포했고, 해방 이후 1949년에서야 오늘날의 국기제작법이 만들어졌다.
미적 감각이 남달랐던 고유섭은 태극기도 제법 그럴 듯하게 그렸을 게 분명하다. 아이들에게 나눠줄 많은 태극기를 만드느라 바삐 그렸겠지만 우리의 민족혼을 담아내기 위해 애썼을 터이다.
고사리손마다 쥐어진 태극기의 행렬은 지금의 동인천역에서 참외전로를 따라 배다리까지 간 뒤 싸리재를 거쳐 우현로를 돌아 다시 동인천역으로 돌아왔을 수도 있다.
범위를 더 넓혀보면 동인천 삼치골목에서 자유공원까지 이어졌을 수 있다.
고유섭이 붙잡혀 갇혔을 인천경찰서는 1884년 지어진 서양식 2층 건물인 일본영사관 부지 안에 있었다.
영사관은 1906년 통감부의 설치와 함께 인천 이사청이 됐고, 1910년 이후부터 인천부청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당시 인천영사관의 도면을 보면 경찰서 건물 옆에는 작은 감옥이 따로 있었다.
지금의 경찰서 유치장과 같은 곳으로 고유섭은 이곳에 구류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기록원이 보관하고 있는 당시 경찰범처벌규칙(조선총독부령 제40호)을 보면 총독부는 항일 투쟁을 조직화하는 조선인을 강력히 처벌했다.
여기에는 87가지 처벌 조항이 나오는데 이 중 제20조 '불온한 연설을 하거나 불온한 문서, 도서, 시가의 게시·반포·낭독 또는 방음(放吟)을 하는 자'는 구류 또는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아마도 고유섭은 바로 이 제20조로 옭아매 경찰이 체포해 구금했을 것이다.
고유섭은 감옥에 갇혔다가 3일 만에 풀려났는데, 그의 부인 이점옥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배인복이 '월간 공예'에서 밝힌 인터뷰와 같은 내용이다.
2006년 인천문화재단이 펴낸 '아무도 가지 않을 길'에서 이점옥 여사는 "유치장에 들어가 있는 동안 사흘 만에 큰아버지의 첩이 데리고 들어온 아들 흥섭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형사들과 잘 알아서 풀려나왔다 한다"고 했다.
"고유섭의 수감 동료가 담배를 들여왔다"는 이점옥 여사의 증언을 보면 당시엔 소위 '빽'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했던 일로 짐작된다.
고유섭은 만세운동이 있던 이듬해인 1920년 서울에 있는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인천에서 서울로 기차를 타고 통학하는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에서 진보적 문인이었던 고일, 정노풍, 진종혁 등과 함께 문화운동을 펼쳤다. 고일은 '인천석금'에서 친목회를 통해 민족해방정신을 내포한 문학운동을 전개했다고 회고했다.
고유섭이 1919년 3월 만세운동을 했던 인천 용동 일대. 동인천길병원이 고유섭 생가가 있던 자리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
고유섭은 1927년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해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했다.
졸업 후 경성제대 미학연구실 조교로 일하다 1933년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1930년부터 10년 동안 '진단학보'를 비롯한 학회지와 신문, 잡지에 150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송도고적'을 비롯한 그의 저서는 '우현 고유섭 전집'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그는 간경화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개성 수철동 묘지에 묻혔다.
고유섭의 고향 인천과 전국 각지에서는 그동안 그의 뜻과 업적을 기리는 다양한 기념사업이 진행되었지만 3·1운동 관련 내용은 빠져 있었다.
1974년 30주기 추모비가 당시 인천자유공원 내 시립박물관에 세워졌고, 1980년 한국미술사학회는 '우현미술상'을 제정했다.
1992년 새얼문화재단이 그의 동상을 제작해 인천시립박물관(옥련동)에 세웠다. 용동 큰우물 옆 그의 생가터에는 기념비가 세워졌고, 동인천역에서 답동사거리를 잇는 길은 '우현로'라 불리고 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인천이 나서서 우현의 3·1운동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검토하고 기릴 수 있기를 바란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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