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인천·(4)]인천의 3·1운동

동맹휴학이 당긴 '만세불꽃' 시민속으로 번지다

김주엽 기자

발행일 2019-03-14 제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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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계양구 장기동에 있는 황어장터 만세운동 기념비. /인천 계양구 제공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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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처음 3·1운동이 시작된 곳은 어디일까?

 

인천에서는 얼마나 많은 만세운동이 벌어졌을까?

3·1운동 10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인천에서의 3·1운동 관련 통계조차 제대로 정립돼 있지 않다.

이병헌이 1959년 쓴 '삼일운동비사(三一運動秘史)'에서는 '3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인천창영초등학교교) 3~4학년 학생들이 선생이 없는 사이에 학교를 뛰쳐 나와서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 생도들과 합류해 시내 중심에서 시위했다'고 밝히고 있다.

초등학교 학생들과 고등학교 학생들이 연대해 만세행진을 벌였다는 얘기다.

1919년 3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인천창영초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펼쳐진 3·1운동 소식을 접한 이 학교 3, 4학년 학생들이 만세 운동의 하나로 동맹 휴학을 결정한 것이다. 당시 동맹 휴학은 학생들이 일제에 항거하는 가장 적극적인 형태의 항일 투쟁이었다.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 3·4학년과 공립상업학교 학생들 연대 시위 '시발점'
기독교인 중심 만국공원 집회·상인들 가게 문 닫는 철시운동 급속도로 퍼져
강화 1만명의 함성·계양 황어장터·석모도 4월 운동… 북부권·섬에서도 '활발'
현재 관련통계 중구·동구·미추홀구 일부만 반영 '미흡' 市 전면 재조사 필요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1918년 통계연보'에 따르면 4년제로 운영되는 당시 보통학교 1~4학년 학생의 평균 나이는 만 11~15세였다.

만 20세가 넘어 학교에 다니는 것도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인천공립보통학교의 동맹 휴학을 주도했던 김명진·이만용·박철준·손창신 등도 당시 만 16~19세였다.

학생들이 동맹 휴학에 돌입하자 학교 교직원들은 이 사실을 경찰에 알렸다.

김명진과 이만용은 교직원들의 행동에 반발했고, 동맹 휴학 시작 이틀 뒤인 8일 오후 9시 학교 건물 2층에 몰래 들어가 미리 준비한 절단용 가위로 전화선을 끊어 경찰서와 연결된 통신을 차단했다.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 휴학은 열흘 가까이 계속됐다. 경찰이 학부형 회의를 소집해 25명을 처벌하겠다는 강경책을 발표했지만, 학생 405명 가운데 85명이 다음 날 결석할 정도로 항일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이를 시작으로 인천에서 3·1운동은 급속도로 번져 나갔다.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나서자 차츰 일반 시민들도 동조했다.

3월 9일 오후 5시 30분께에는 기독교인과 청년 학생 300여명이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모여 만세를 불렀다.

오후 8시 30분께에는 50여명의 시민들이 경인가도(현 경인로) 부근에서 만세 운동을 진행하다 경찰과 충돌하기도 했다. 또 3월 31일에는 상인들이 가게의 문을 닫는 철시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용유도 만세운동 기념비
인천 중구 용유동에 있는 3·1 만세 운동 기념비. 당시 용유도 주민 150여 명이 이곳에서 3·1운동을 벌였다. /인천 중구 제공

인천시가 1973년 발행한 '인천시사'는 3·1운동 때 인천에서 만세운동이 8번 열렸고, 9천명이 집회에 참가했으며, 15명이 투옥됐다고 적었다. 이는 박은식이 1920년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1919년 당시 인천부는 지금의 중구·동구와 미추홀구 일부 지역으로 축소된 상태였다.

인천도호부청사가 있는 미추홀구 문학동 일대도 계양·부평지역과 함께 부천군이 됐고, 강화군도 있었다. 옹진군은 부천군에 속한 지역이었다. 지금 강화 옹진을 포함한 인천 전역을 놓고 보면 당시 인천부는 극히 작은 구역이다.

계양과 부평 등 인천 북부지역뿐만 아니라 강화·옹진 등 섬지역, 문학동과 서창동 등 당시 인천이 아니었던 곳에서도 3·1운동은 활발히 벌어졌다.

강화보통학교(현 강화초등학교) 3학년과 4학년 학생 100여명은 3월 12일과 13일 이틀 동안 칠판에 태극기를 그리고, 운동장에서 만세 운동을 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2학년 학생이었던 황도문은 자신의 고향인 강화에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유봉진에 전달했고, 이를 지역 주민에게 배포하면서 강화 지역의 3·1운동은 들불처럼 번졌다.

3월 18일에는 강화군 부내면(현 강화읍 관청리) 읍내 장터에서 1만명이 참여한 만세 운동이 있었고, 27일에는 면사무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강화 지역의 3·1운동 열기는 김포를 거쳐 계양과 부평 등 인천 북부지역에도 영향을 끼쳤다. 1919년 3월 27일 자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소요사건의 후보·경기도 부평'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당시 계양과 부평 지역의 상황을 설명했다.

"인천 시내는 물론이요 부근 일대는 관헌의 취체(일본어로 단속)가 엄중하기 때문에 비교적 평온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데 일전 강화도의 소요가 도화선이 돼 그 다음에 접근된 김포도 일어났고 다시 그 동네와 인천 경찰서 관내의 경계선 되는 부천군도 불온의 형세가 있음으로 인천경찰서에서는 만일을 경비키 위해 하뢰 순사부장 외 순사 2명을 부평주재소에 임시 응원으로 파견하였더라."

매일신보에서 말한 불온의 형세는 계양구 장기동에서 있었던 황어장터 만세운동이다.

황어장터는 당시 계양구 지역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 조선총독부가 1924년 발간한 '조선의 시장'에서는 '경기도 부천군에는 2곳의 시장이 있는데 한 곳은 소사리에 있고, 나머지는 장기리에 있다.

이들 시장에는 1곳 당 평균 이용인구가 1천~2천명에 달한다'고 표현했다. 1천명이 넘는 주민이 이용하는 시장이기 때문에 만세 운동 장소로 적합했던 것이다.

심혁성
계양구 장기동에서 열렸던 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심혁성 지사. /인천보훈지청 제공

당시 재판기록에 따르면 계양면 오류리에 거주하던 천도교인 심혁성은 3월 24일 오후 2시께 황어장터에 모인 6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 같은 혐의로 경찰에 붙잡힌 심혁성을 구하기 위해 300여명의 주민이 심혁성이 있던 면사무소를 습격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이 휘두른 칼에 맞아 이은선이 숨지기도 했다.

황어장터 만세운동 사건으로 40여명이 체포됐고, 심혁성은 징역 8월을 선고 받았다.

3월 27일에는 문학면 관교리(현 미추홀구 문학동·관교동 일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이상태 등의 재판기록을 보면 이들은 이날 밤 마을 주민 15명과 함께 마을 뒷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동네를 행진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경찰에 붙잡혔다.

이상태는 재판에서 "할 수 있다면 원래의 한국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독립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만세를 불렀다"고 진술했다.

인천 내륙뿐만 아니라 섬 지역에서도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 3월 28일 용유면 관청리 광장에는 독립을 염원하는 150명의 만세 운동이 있었다.

당시 서울 배재학당에 다니던 조명원은 23일 독립선언서를 품고 용유도에 귀향했다. 조명원은 조종서, 문무현, 최봉학 등과 함께 '혈성단(血成團)'을 조직하고, 격문을 만들어 28일 관청리 관장에 모여 만세 운동을 벌일 것을 주민들에게 권유했다.

28일 시작된 시위는 용유도 내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이틀 동안 이어졌다.


덕적도에서는 4월 9일 학교운동회를 맞은 명덕학교 학생 50명과 학부형 30여명이 참여해 만세운동을 벌였다.

명덕학교 교사였던 임용우 선생은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투옥 중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순국했다.

명덕학교 독립운동의 영향으로 인근에 있는 문갑도와 울도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강화도와 석모도에서도 만세운동은 거세게 일었다. 석모도는 특히 4월에도 펼쳐졌다.

1956년 발간된 '경기도지'에 실린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통계를 보면, 부평에서 만세운동이 6번 있었고 950명이 집회에 참가했다. 투옥자도 98명으로 인천보다 많았다. 강화에서도 2번의 만세운동이 있었고, 400명이 참가했다고 나온다.

현재 널리 알려진 인천의 만세운동 통계는 '중·동구와 미추홀구 일부'만 범위로 할 뿐이다. 부평·계양지역이나 강화, 옹진, 영종·용유 등지의 만세운동도 반영할 수 있는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인천연구원 김창수 부원장은 "행정구역 변화가 많았고, 과거보다 사료가 더 많아졌다"며 "인천시 등 지자체가 나서 전면적인 재조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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