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인천·(5)]석모도와 이안득

러시아서 항일운동 적발… 강화 유배지 "만세" 앞장

김주엽 기자

발행일 2019-03-21 제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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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강화군 석모도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이곳으로 유배된 이민 2세대가 이끌었다.

 

그것도 '항일 혐의'로 유배 중인 상태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1919년 4월 7일 강화군 석모도의 첫 3·1 운동은 이안득(李安得)이라는 19세 청년의 주도로 이뤄졌다. 이안득에 대한 1919년 재판 기록에 따르면 그는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적발돼 거주제한 처분을 받고 그 7개월 전 석모도로 유배됐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가 제공하는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를 보면, 이안득은 1900년 12월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태어났다.

1918년 6월 러시아 반혁명군(軍)에 참여해 반일 운동을 벌이다 지휘부에 붙잡혀 일제에 넘겨졌으며, 1918년 9월 강화도 석모도로 유배됐다.

그는 고향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섬에 유배를 와 감시대상인 신분으로 마을 주민 수십 명과 함께 당산에 올라 횃불을 피우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독립운동과 관련한 그의 기록은 불명확하다. 2016년 발간한 '신편 강화사'에서는 그에 대해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거주제한 처분을 받았다'고 출신지가 다르게 기록돼 있다.

같은 해 인천시가 펴낸 '인천시사'에는 '이안득의 주도로 삼산면 석모리에서 십수명이 산정에 올라 봉화를 피우고 독립만세운동을 불렀다'고 적혀 있을 뿐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찾아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올려놓은 자료에는 그의 이름이 '이안덕(李安德)'이라고 명시돼 있다.

100년이나 흘렀지만 그의 이름이나 행적 등에 대해 아직 명확히 밝혀진 부분이 없는 셈이다.

만주와 러시아 지역 항일운동사 연구자인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1918년 8월 일본이 시베리아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러시아에서 반일운동을 진행하다 붙잡혀 유배를 온 사람이 있다는 것은 학계에서 주목한 적이 없다"며 "관계기관 등에서 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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