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라고 눈치챌 수 없도록 가벼운 옷차림에 지팡이 하나만 들었다.
경술국치(8월 29일)로 나라를 빼앗긴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이건승은 1906년 전 재산을 쏟아부어 강화도에 설립한 민족주의 교육기관인 계명의숙(啓明義塾)의 교장을 맡고 있었다.
경술국치 직후 일제가 주려던 위자금도 이미 거부한 터였다.
촘촘해진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판단이 그를 서간도로 향하게 했다.
그해 12월 1일 압록강을 건넌 이건승은 1924년 2월 18일 향년 67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망명생활을 계속했다. 그는 강화를 떠나면서 서간도에 도착할 때까지 지은 26수의 시를 통해서 망명 여정을 기록했다.
'강화학의 마지막 행동가'라고 평가받는 이건승의 서간도 망명 이후의 행적은 인천지역에서조차 제대로 조명되지 않고 있다.
인천시가 발간한 '인천시사'나 '인물로 보는 인천사'(2013), 강화군이 펴낸 '신편 강화사 증보'(2015) 등에서는 이건승의 13년 동안 이어진 망명생활에 대해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는 정도로만 간략하게 언급했다.
강화도를 기반으로 하던 그의 활동무대가 이역만리 만주 땅으로 옮겨지면서, 인천을 테두리로만 하는 지역사회의 독립운동연구에서 멀어진 게 아닌가 싶다.
이건승을 깊이 연구한 연구자들은 그를 가리켜 "만주지역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씨앗을 뿌렸다"고 평가하면서 "독립유공자로 추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건승은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1649∼1736)가 뿌리내린 양명학 '강화학파'의 일원이다. 한말삼재(韓末三才) 중 한 명으로 꼽힌 당대 명문장가 이건창(李建昌·1852~1898)이 그의 형이다.
육촌동생인 이건방(李建芳·1861~1939)은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정인보(鄭寅普·1893~1950)의 스승으로 유명하다. 경술국치 직후 순절한 대표적인 우국지사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과도 교우가 깊었다.
1910년대 서간도 유하현의 이주 한인 마을 모습. 경술국치 이후 많은 애국지사들이 서간도로 이주해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했다. /독립기념관 제공 |
이건승은 1905년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 정원하(鄭元夏·1855~1925), 홍승헌(洪承憲·1854~1914) 등 양명학자들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당시 황현에게 편지를 보내 "나라가 망했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살아있는 것, 사람이 마땅히 죽어야 할 때 오히려 살아있는 것은 모두 떳떳한 도리가 아닙니다"라며 자결을 암시했다. 하지만 구국계몽운동에 투신하기로 생각을 바꿔 강화도 사기리에 계명의숙을 설립했다.
황현은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기 직전인 1910년 8월 6일 자결을 택했다. 5년 전 이건승에게 받은 편지가 떠올랐을지 모른다.
황현의 순절 소식을 들은 이건승은 이번에는 죽음으로 망국을 한탄하지 않기로 했다. 강화를 떠난 이건승은 개성에서 홍승헌과 이건방을 만났고, 1910년 10월 2일 홍승헌과 함께 신의주로 올라가는 경의선 열차를 탔다.
이건방은 "강화학을 전승해야 한다"는 이건승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국내에 남았다. 얼어붙은 압록강을 썰매를 타고 건넌 이건승은 서간도 땅을 밟으며 '십이월일일(十二月一日), 이사막도강(離四幕渡江), 고청인상거발행(雇淸人商車發行)'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이 몸은 마치 요동의 학처럼(此身正似遼陽鶴) 도리어 천년을 기다려 옛 거처로 돌아왔네(却待千年返舊居)"
그 시의 일부다.
일제강점기 서간도로 망명한 유학자들을 연구한 이은영 성균관대 한문학과 초빙교수는 "자신이 요동의 학처럼 천년을 기다려 고향인 옛 고구려 땅으로 돌아왔다고 한 것은 처음 정착지로 선택한 회인현 횡도촌을 고향으로 인식했다는 의미"라며 "요동의 서간도를 분명한 우리의 영토로 여기고 망명지로 선택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건승이 정원하, 홍승헌과 함께 정착한 서간도 회인현 횡도촌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었다.
9대가 정승·판서·참판을 지낸 조선 최고 명문가 후손인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1867~1932) 일가가 대표적이다. 이회영을 포함한 6형제 집안 50여명이 1911년 1월 횡도촌으로 집단 망명했다.
이회영 일가가 급하게 가산을 정리해 마련한 독립운동자금은 현재 가치로 약 60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건승과 이회영은 망명 이전부터 대대로 교류가 있었다.
이회영 일가의 집단 망명에 이건승의 망명이 어떻게든 영향을 끼쳤을 터이다.
그러나 이건승은 망명 시절 쓴 문집 등에 이회영과의 만남을 기록하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국내외 인사들과 교류했던 편지 등을 모두 태워서 없앤 이건승의 철저한 함구 덕분이라고 평가한다.
이회영 일가는 회인현 북쪽인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를 거쳐 통화현 합니하에 독립군 양성기지인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2009년 쓴 평전 '이회영과 젊은 그들'을 통해 이회영의 사상적 종착점이 모든 인간의 절대 자유와 절대 평등을 주장하는 '아나키즘'인 것은 사대부의 계급적 특권을 인정하지 않아 조선 시대 '이단'으로 몰렸던 양명학의 영향이라고 설명했다.
1922년 일제가 작성한 이건승의 동향에 대한 정보보고 문건. '배일선인(排日鮮人)의 정황(情況)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공 |
이건승은 망명생활 중에도 활발한 저술활동을 이어갔다. '안중근전', '이재명·김정익전' 등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이은영 교수가 2016년 펴낸 학술서 '요동의 학이 되어'에는 이 교수가 번역한 '이재명·김정익전'의 내용 일부가 실렸다.
"완용이 수레에서 떨어지자, 재명은 그 배에 걸터앉아 마구 찔렀다. 한 번 찌를 때마다 번번이 대한만세를 외쳤다. 칼날이 들어가서 뱃속의 창자를 끊었는데, 일본 순사들이 그(이완용)를 구하고 재명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고는 살인죄로 교수형에 처했다. 완용은 병원에 입원해서 개의 창자를 이어서 죽지 않았다."
이재명(李在明·1887~1910)은 1909년 12월 명동성당 앞에서 총리대신이던 매국노 이완용(李完用·1858~1926)을 처단하려고 공격했으나, 부상만 입히고 붙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독립운동가다.
이건승이 이완용의 창자를 '개의 창자'로 표현한 점이 눈길을 끈다. 장기 이식이 일반적이지 않을 때, 특히나 동물의 장기를 사람에게 옮기는 상상을 한 거다.
물론 이완용을 개로 표현하려는 것이었지만 의학과 문학적 측면 양쪽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1905년 체코에서 각막이식 수술에는 성공했지만, 신장이나 폐 등 사람 간 장기이식은 1950년대 이후에나 가능했다.
사람의 간이나 장이식 수술은 1987년이 돼서야 미국에서 시작됐고, 동물의 장기를 사람에게 이식하는 수술은 아직도 연구단계다.
인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 있는 이건창 생가. 이건승의 형인 이건창은 당대 명문장가이자 대표적인 강화학파 유학자다. 이건승은 사기리에서 생활하며 교육기관인 '계명의숙'을 설립해 민족주의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
장기이식이 첫걸음도 떼지 않은 20세기 초반에 매국노가 동물의 창자를 이어서 살았다고 표현한 이건승의 상상력이 기발하다. 그는 망명 중 여러 시와 글을 쓰며 조국 독립 의지를 드러났다.
이건승은 서간도에서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독립운동가 노상익(盧相翼·1849~1941) 등 서간도 망명인사들을 주축으로 한 '서구결사(西溝結社)'라는 이름의 단체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 단체가 어떠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현재까지 발굴되지 않았지만, 참여 인사들 면면을 봤을 때 항일운동을 위한 조직이었을 것이라고 연구자들은 보고 있다.
이건승은 고국에 있는 이건방, 정인보 등과 수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는 불살랐기 때문에 남아 있지 않다. 정인보는 2차례에 걸쳐 서간도를 방문해 이건승을 만났다.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정인보가 재산을 정리해 이건승에게 군자금으로 전달했다거나 이건방이 이건승에게 보내기 위한 재산을 장독에 숨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건승이 망명 중에도 일본 순사로부터 민단에 가입하라는 협박을 당하는 등 감시가 만만치 않았다는 기록은 남아 있다.
동아일보는 1924년 3월 29일자 신문에 '감회 많은 그의 일생'이라는 소제목으로 이건승의 부고 기사를 실었다.
동아일보가 1924년 3월 29일자 신문에 보도한 이건승의 부고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공 |
기사에서는 '독립 전에는 다시 고국의 흙을 밟지 아니하기로 결심하고 혈루를 머금고 만주로 달아났다'고 썼다.
이덕일 소장은 이건승의 망명에 대해 "나라가 망하자 온 생애를 걸고 망명했던 소수의 사대부들 가운데 가장 먼저 나섰다"며 "그 결단이 대한민국 건국의 씨앗이었다"고 평가했다.
황현, 노상익, 김택영(金澤榮·1850~1927) 등 이건승과 관계가 깊었던 이들은 모두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
인천지역이 앞장서서 이건승의 행적을 재평가하고, 새롭게 조명할 때다.
현재 '이건창 평전'을 집필하고 있는 이은영 교수는 "이건승 선생은 후손이 없어 자료 발굴에 적극적이지 못한 측면이 있지만, 김택영 선생처럼 저술활동만으로도 독립유공자 자격이 충분하다"며 "서간도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였다는 점은 동아일보 부고 기사 등 여러 자료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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