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혁명가 굴레 속에 '외면'
평화시대 맞아 남북공동연구 필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내는 등 일생을 항일 독립운동에 바친 성재 이동휘(1873~1935)는 사회주의 혁명가라는 굴레에 갇혀 오랜 기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남북분단 상황은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조직을 세운 그의 존재를 애써 외면했고, 광복 50주년인 1995년 독립운동 유공자 추서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연대기조차 정리하지 못했다.
이승만과 대립하고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던 그를 조명하기엔 시대적 상황이 너무나 엄혹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이동휘에 대한 연구 기틀이 체계적으로 잡혔지만, 해외 망명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인천 무의도 유배생활(1911~1912년)을 비롯한 그의 일부 행적이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쏙 빠져 있는 점은 큰 아쉬움이 남는다.
무의도 유배는 이동휘가 국내 항일운동에 마침표를 찍고, 해외 항일운동을 시작하기 전까지의 중요한 연결고리이지만 학계에서는 아직까지도 크게 주목하지 않고 있다.
이동휘에 대한 연구는 대개가 2차 사료를 근거로 하고 있다. 냉전시기 남북분단과 중국, 러시아와의 단절은 그의 주된 활동무대에서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오늘날 이동휘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접점에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는 민족의 단결을 부르짖으며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냈고, 한인사회당을 조직한 사회주의 혁명가이기도 했다.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북한과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남한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는 무의도 유배생활 등 이동휘 일대기에서 사라진 퍼즐 조각을 하나씩 찾아내 맞춰야 할 적기라고 할 수 있다.
함경남도 출신이지만 인천의 독립운동가라 해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그를 남북이 공동으로 재조명하는 학술연구도 평화의 시대를 맞아 새로이 요구되고 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평화시대 맞아 남북공동연구 필요
남북분단 상황은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조직을 세운 그의 존재를 애써 외면했고, 광복 50주년인 1995년 독립운동 유공자 추서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연대기조차 정리하지 못했다.
이승만과 대립하고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던 그를 조명하기엔 시대적 상황이 너무나 엄혹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이동휘에 대한 연구 기틀이 체계적으로 잡혔지만, 해외 망명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인천 무의도 유배생활(1911~1912년)을 비롯한 그의 일부 행적이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쏙 빠져 있는 점은 큰 아쉬움이 남는다.
무의도 유배는 이동휘가 국내 항일운동에 마침표를 찍고, 해외 항일운동을 시작하기 전까지의 중요한 연결고리이지만 학계에서는 아직까지도 크게 주목하지 않고 있다.
이동휘에 대한 연구는 대개가 2차 사료를 근거로 하고 있다. 냉전시기 남북분단과 중국, 러시아와의 단절은 그의 주된 활동무대에서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오늘날 이동휘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접점에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는 민족의 단결을 부르짖으며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냈고, 한인사회당을 조직한 사회주의 혁명가이기도 했다.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북한과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남한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는 무의도 유배생활 등 이동휘 일대기에서 사라진 퍼즐 조각을 하나씩 찾아내 맞춰야 할 적기라고 할 수 있다.
함경남도 출신이지만 인천의 독립운동가라 해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그를 남북이 공동으로 재조명하는 학술연구도 평화의 시대를 맞아 새로이 요구되고 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저작권자 ⓒ 경인일보 (www.kyeongin.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