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인천

[독립운동과 인천·(8)]독립운동 주역 이동휘, 지우개로 지운듯한 유배행적

임정 초대 국무총리와 무의도 유배
사회주의 혁명가 굴레 속에 '외면'
평화시대 맞아 남북공동연구 필요


2019041001001002500047901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내는 등 일생을 항일 독립운동에 바친 성재 이동휘(1873~1935)는 사회주의 혁명가라는 굴레에 갇혀 오랜 기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남북분단 상황은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조직을 세운 그의 존재를 애써 외면했고, 광복 50주년인 1995년 독립운동 유공자 추서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연대기조차 정리하지 못했다.



이승만과 대립하고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던 그를 조명하기엔 시대적 상황이 너무나 엄혹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이동휘에 대한 연구 기틀이 체계적으로 잡혔지만, 해외 망명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인천 무의도 유배생활(1911~1912년)을 비롯한 그의 일부 행적이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쏙 빠져 있는 점은 큰 아쉬움이 남는다.

무의도 유배는 이동휘가 국내 항일운동에 마침표를 찍고, 해외 항일운동을 시작하기 전까지의 중요한 연결고리이지만 학계에서는 아직까지도 크게 주목하지 않고 있다.

이동휘에 대한 연구는 대개가 2차 사료를 근거로 하고 있다. 냉전시기 남북분단과 중국, 러시아와의 단절은 그의 주된 활동무대에서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오늘날 이동휘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접점에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는 민족의 단결을 부르짖으며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냈고, 한인사회당을 조직한 사회주의 혁명가이기도 했다.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북한과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남한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는 무의도 유배생활 등 이동휘 일대기에서 사라진 퍼즐 조각을 하나씩 찾아내 맞춰야 할 적기라고 할 수 있다.

함경남도 출신이지만 인천의 독립운동가라 해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그를 남북이 공동으로 재조명하는 학술연구도 평화의 시대를 맞아 새로이 요구되고 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경인일보 포토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김민재기자 기사모음

경인일보

제보안내

경인일보는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제보자 신분은 경인일보 보도 준칙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며, 제공하신 개인정보는 취재를 위해서만 사용됩니다. 제보 방법은 홈페이지 외에도 이메일 및 카카오톡을 통해 제보할 수 있습니다.

- 이메일 문의 : jebo@kyeongin.com
- 카카오톡 ID : @경인일보

개인정보의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안내

  • 수집항목 : 회사명, 이름, 전화번호, 이메일
  • 수집목적 : 본인확인, 접수 및 결과 회신
  • 이용기간 :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기사제보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익명 제보가 가능합니다.
단, 추가 취재가 필요한 제보자는 연락처를 정확히 입력해주시기 바랍니다.

*최대 용량 10MB
새로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