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에게 듣는 중국 이야기·(2)어느 老화교의 슬픈 비망록]두 정권에 걸친 8년 외교관생활… 한간(매국노) 멍에

박경호 기자

발행일 2019-04-12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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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후 7시 남동구 미추홀도서관에서 열린 인천대 중국·화교문화연구소 시민강좌에서 송승석 인천대 중국학술원 부원장이 노화교의 일생을 다룬 책 '그래도 살아야 했다'를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미추홀도서관 제공

1937년 중일전쟁 직전 조선 파견
2차대전후 귀국 수십년 수형생활

1980년 대만행 친일 경력만 부각
평생 자유갈구… 한국서 생 마감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인천시 미추홀도서관, 경인일보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2019년 인천대 중국·화교문화연구소 시민강좌 '저자에게 듣는 중국 이야기'의 두 번째 강좌가 11일 오후 7시 인천 남동구 미추홀도서관에서 열렸다.

이날 강좌에서는 송승석 인천대 중국학술원 부원장이 2017년 번역해 출간한 '그래도 살아야 했다'(왕용진 저)를 중심으로 한국 화교의 삶과 역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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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강연 요지


'그래도 살아야 했다'(원제 : 悲慘回憶)는 어느 노화교의 슬픈 비망록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중화민국 외교관으로 1937년 중일전쟁 직전부터 조선이 해방되는 1945년까지 조선에서 근무했던 왕용진(王永晉)이란 인물의 개인 회고록이다.

이 회고록은 그의 조선 근무기간을 포함해 이전과 이후에 걸친 굴곡진 개인사는 물론 식민, 분열, 냉전 등 격동의 동아시아 현대사를 일관되게 좇고 있는 일종의 역사기술이기도 하다.

회고록을 통해 우리는 일본이 중국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는 중 자행했던 각종 역사적 사건들이 민초들의 시선에서는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이자 만주국의 유일한 황제였던 푸이(溥儀)와의 직접적 대면과 대화에 기초해 봉건왕조의 몰락 과정과 그 필연성의 단면도 엿볼 수 있다.

신중국 성립 과정에서 중국인들이 겪어야 했던 민족 분열, 대약진, 문화대혁명 같은 정치적 암흑의 상흔들이 왕용진의 눈과 귀를 통해 생생한 화면으로 재구성되고 있기도 하다.

왕용진은 중일전쟁 발발 직전인 1937년 4월에 장제스의 국민정부 외교관으로 조선에 파견됐다. 친일정권이라 할 수 있는 왕징웨이(汪精衛)의 난징국민정부가 조선의 중국인사회를 장악하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소위 '한간'(漢奸·매국노)이란 멍에를 뒤집어쓴 채 공직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두 정권에 걸친 그의 8년 외교관생활은 1945년 2차 대전의 종식과 함께 마감된다. 당시 그의 마지막 직책은 원산영사관 영사였다.

그는 이제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친일파'란 오명이 고향 대신 소련 하바롭스크 전범수용소로 이끌었다.

1950년 고향 중국에 돌아갔지만, 그의 곁에는 사랑하는 처자식도 없었고 중화민국도 없었다.

7년간의 노동교화소 생활, 밀항 실패로 인한 무기징역과 수형생활로 중국에서의 30년 삶 대부분을 홀로 형무소와 수용소를 전전하며 지내야 했다.

하늘도 무심하진 않았든지 그는 1980년 자유주의 중국 즉, 타이완으로 갈 수 있었고 그곳에서 가족과 상봉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중국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타이완에서의 삶 역시 녹록하지 않았다.

타이완 중화민국정부는 정작 그의 외교관으로서의 이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고, 오로지 한간으로서의 경력만을 부각시켰다. 결국 그는 물질적·정신적으로 힘겨웠던 10여년의 타이완 생활을 접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평생 자유를 갈구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물리적 고향인 공산주의 '조국' 중국대륙을 등지고 이념을 따라 자본주의 '정권'인 타이완 중화민국을 택했다.

하지만 결국 물리적 고향인 중국도 아니고, 이념적 정권인 타이완도 아닌 제3의 땅인 한국에서 100년의 생을 마감했다.

그는 줄곧 정치적 자유를 갈망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가 원했던 자유는 이념이나 국가 따위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어쩌면 가족의 품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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