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만에 귀환' 계봉우 선생, 인천과 인연은… '영종도 예단포 십시일반' 도움 잊지못해

김민재 기자

발행일 2019-04-23 제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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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침략 비판활동 '유배 처분'
착취받던 주민들 끼니 떼어 도움
선생 당시 고마움 자서전에 남겨
인하대 사학과 중심 저술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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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온 독립운동가 계봉우(1880~1959) 선생은 1916년 12월부터 꼭 1년 동안 인천 영종도 예단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인천과 인연을 맺었다.

예단포 사람들은 고된 유배 생활의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그가 훗날 해외 독립운동의 선봉에 설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유배 생활을 딛고 일어나 1919년 3월 학생만세 운동에 기여했고, 해외에서 우리 말과 역사를 가르치는 데 힘썼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외롭게 숨을 거둔 지 60년. 계봉우 선생을 인천이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인천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계봉우는 한국과 러시아, 중국, 카자흐스탄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했던 한글학자이자 역사학자다.

북간도와 연해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뛰어든 그는 1916년 일본 침략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고 글을 썼다는 이유로 일본에 의해 만주에서 쫓겨나 그해 12월 영종도로 유배됐다.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이 보관한 '재류금지 명령 집행 보고의 건'을 보면 계봉우 선생은 중국 연길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중근 전설을 기고했고 배일(排日) 연설을 하는 등 과격한 언동을 했다는 이유로 유배 처분을 받았다.

또 조선인들이 연길에 설립한 학교에서 역사, 지리, 한문을 가르치면서 역사교과서에 왜적의 침입과 한일강제병합 굴욕을 서술해 학생들의 적개심을 불러왔다는 이유였다.

해외에서 이름을 떨친 계봉우 선생이 영종도로 유배되자 예단포 주민들은 가르침을 얻기 위해 그를 찾았지만, 일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예단포 주민들은 일제의 착취 속에서도 먹을 것을 떼어내 계봉우 선생을 도왔다.

선생은 카자흐스탄 거주 시절 1940~1944년 쓴 자서전 '꿈 속의 꿈'에서 "금고를 당한 사람은 자기의 힘으로 먹게 되는데 그곳에서는 어업을 위주로 하여 나에게는 거기에 소용되는 기능이 없었다. 내가 먹은 일년 밥값은 그곳의 부형들이 분담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나에 대한 동정의 표현이었다"고 영종도 주민들에 고마움을 표현했다.

계봉우 선생은 1919년 3월 5일 남대문 학생 독립운동의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하며 국내 독립운동을 주도했다가 중국으로 넘어가 북간도대표로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1920년에는 임시정부 간도 파견원으로 활동했고,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했다.

1959년 7월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80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민족 교육과 독립 운동, 사회주의 건설운동, 한국학 연구에 헌신했다.

해방 이후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그의 공적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1995년에서야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인하대 사학과가 중심이 돼 1990년부터 행정 발굴과 저술 목록 정리에 힘쓰고 있으나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있다.

인천 영종도 유배생활과 학생독립운동 선언문 초안 작성 등에 대한 추가 연구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계봉우 선생의 손녀 신 류보피씨는 "할아버지께서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하셨는데 마침내 그 꿈이 이뤄지게 돼 기쁘게 생각한다"며 "한국 정부가 이 모든 수고와 비용을 부담해줘 매우 감사하다"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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