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있는 에세이]함관령의 묏버들가지와 홍랑

김윤배

발행일 2019-05-10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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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평사 '고죽'과 운명적인 만남
진중 스캔들로 상소 이어져 작별
헤어지며 돌아오는 길 고갯마루서
비 맞으며 하염없이 울면서 읊은 시
재회의 간절함·이별의 아픔 '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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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배 시인
무릇 시인은 불후의 작품 한 편을 위해 일생을 바친다. 이상의 '오감도', 김소월의 '진달래꽃', 윤동주의 '서시', 이육사의 '광야', 김수영의 '풀'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시인들은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단 한 편의 시로 불후의 반열에 오른 시인이 있다. 조선시대의 기녀였던 홍랑은 '멧버들 가려 꺾어'라는 시조로 후세에 널리 알려진 시인이다. 혹 여러 편의 시조를 지었을지도 모르지만 전해지지 않아 그녀의 작품은 단 한 편으로 한국문학사에 빛난다. 그 한 편은 연인이었던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의 '고죽유고(孤竹遺稿)'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불후의 명작 뒤에 숨겨진 그녀의 사랑을 짚고 나면 마음이 아리고 애틋해진다. 홍랑은 함경도 홍원의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한 어린 날을 보냈다. 아명은 애절(愛節)이라고 전한다. 어머니를 여의고 천애 고아로 살아가야 했던 그녀를 친자식처럼 돌봐준 사람은 어머니를 치료해주던 최의원이었다. 열다섯 살쯤 이웃에 살던 함경도 홍원관아의 노기가 찾아와 관아에서 의녀와 여악을 구하니 천거하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해 여러 날의 고민 끝에 관기가 되기로 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이미 창과 가야금과 춤사위를 알던 애절은 홍랑(洪娘)이라는 기명을 얻어 홍원관아에서 미색과 가무와 문장이 빼어난 관기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고죽 최경창(1539~1583)은 영암군 구서면 구림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백광훈,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부를 만큼 뛰어난 문장가였다. 1568년 과거에 급제했을 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참하관 등 여러 관직을 전전하다가 1573년 북해평사(병마절도사 보좌관)로 함경도 경성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경성으로 가던 중 홍원에 이르자 홍원사또가 축하자리를 마련한다고 그를 취우정으로 안내했다.

이 취우정에서 홍란과 고죽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취기가 도도해지자 홍랑이 거문고를 타면서 시 한 수를 읊었다. 고죽의 '채련곡'이었다. 노래를 마친 홍랑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고죽이 물었다. 누구의 시인지 아느냐고. 고죽 최경창 어른의 시라고, 홍랑이 대답했다. 앞에 있는 선비가 고죽인 것을 안 홍랑은 눈물을 왈칵 쏟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고죽은 홍랑에게 군복을 입혀 진중으로 불러들이기까지 했다. 조정에서 고죽의 진중 스캔들이 문제가 되어 상소가 잇따르자 고죽을 소환하게 된다.

두 사람의 뜨거웠던 사랑은 예기치 않은 파탄을 맞게 된 것이다. 홍랑은 한양으로 떠나는 고죽을 따라나서지만 노비와 같은 신분이었던 홍랑은 쌍성, 지금의 영흥까지만 배웅할 수밖에 없었다. 고죽과 헤어져 울면서 돌아오는 길의 고갯마루가 함관령이었다. 날은 저물고 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그때 읊은 시가 '묏버들'이다. '묏버들 가지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줄로 여기소서'. 버드나무는 예로부터 이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 시에는 재회의 간절함이 은유로 표현되고 있다. 묏버들이 홍랑인지 알아 고죽은 그녀의 시를 영원히 전하기 위해 한시로 옮겨 적고 번방곡(飜方曲)이라 이름하여 자신의 유고집에 남겼다.

고죽이 와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홍랑은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으로 고죽을 찾아가 간병했다. 이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자 홍랑은 다시 홍원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때 고죽이 홍랑에게 준 시가 증별(贈別)이다. '서로 바라보다 난초를 드리나니/지금 멀리 가면 언제나 돌아오리/함관령의 옛 노래를 부디 부르지 마소/지금은 구름비에 청산이 어두워라'.

이별의 아픔이 절절하다.

고죽이 마흔다섯의 나이로 객사하자 홍란은 9년 동안 산중에서 시묘살이를 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홍원으로 돌아간다. 절개를 지키기 위해 아름다운 얼굴을 상처 내고 숯덩이를 삼켜 벙어리로 살았다고 전해온다. 고죽의 작품들을 잘 간직했던 그녀는 고죽의 유품을 유족들에게 전하고 연인의 무덤 앞에서 생을 마감한다. 두고두고 애달픈 서사다.

/김윤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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