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성단]깃대 종(種)

임성훈

발행일 2019-05-16 제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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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아사 침궐종자'(農夫餓死 枕厥種子),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은 베고 죽는다'는 뜻이다. 농부에게 씨앗은 그만큼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다. 종자(種子)인 씨앗이 없다면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농부의 존재가치가 사라진다. 배가 고파 죽을지언정 씨앗을 먹지 않는 이유다. '농심'(農心) 중의 농심이다.

농사와 분야는 다르지만 '농부아사 침궐종자'란 말을 목숨 걸고 실천한 사람들이 옛 소련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독일군에게 900일 동안 포위된 적이 있다. 이 기간, 도시에 있던 소련 사람 150만명 중 70만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었다. 그런데 이 도시에는 씨앗과 열매 표본 등을 쌓아둔 곡식 창고 같은 곳이 딱 한 곳 있었다. 바로 '바빌로프 연구소'다. 이 연구소에는 바빌로프 박사가 전 세계 150여 개국을 돌며 모은 수십만 종류의 씨앗이 있었다. 그러나 연구원들은 단 한 톨의 씨앗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씨앗을 먹었더라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을 텐데 연구원들은 자신보다 '씨앗이 사는 길'을 택했다. 그 결과 9명의 연구원이 굶어 죽었다. 이 연구소에는 밀, 콩, 팥, 녹두, 동부, 호박 등 우리나라의 작물 표본도 보존돼 있다. 바빌로프 박사가 1929년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이동하면서 수집한 것이라고 한다.

눈여겨봐야 할 점은 바빌로프 연구소에 보관된 지구촌 곳곳의 토종 작물 씨앗 가운데 90% 이상은 원래 그 씨앗이 자라던 나라나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100년 남짓한 기간에 벌어진 일이다. 인류의 각고의 노력 없이 생물종다양성 유지는 요원하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난 2015년 문을 연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는 이같은 교훈의 결과물이다.

인천시가 국립생물자원관과 함께 인천 지역을 대표하는 '깃대종(flagship species)'을 선정키로 했다는 소식이다. 깃대종은 유엔환경계획(UNEP)이 제시한 개념으로, 특정 지역의 생태계를 대표할 수 있는 중요 동·식물을 뜻한다. 시는 깃대종이 선정되면 중점관리에 나설 계획이다. 인천 깃대종의 식물분야 후보군은 끈끈이주걱, 붉노랑상사화, 이삭귀개, 통발, 노랑붓꽃, 대청부채, 매화마름 등 7종이다. 저마다 이름도 참 예쁘다. 어느 식물이 깃대종으로 선정되든 생물종다양성 회복의 깃발을 높이 올리길 기대해 본다.

/임성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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